보수 정부 '시장 만능'으로 몰고 '정부 만능'을 마패처럼 사용
일류인 시장과 기업 제치고 삼류 정부가 나서서 빚은 참사
정부와 오래 일해 온 싱크탱크 사람들을 만나면 요즘처럼 정부가 뭐든지 다 하겠다고 나선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과거에도 정부가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의견 수렴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부 주도의 계획에 노골적으로 들러리를 세우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 만능'은 사실상 현 정권의 핵심 철학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폭 늘어난 지난해 예산을 짜면서 "이제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포용국가전략회의에서는 한발 더 나가 "국민들의 삶을 전 생애 주기에 걸쳐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도 했다. 소득 주도 성장·탈원전 정책·공무원 증원 등은 모두 시장의 실패를 전제로 정부가 전면에 나서 추진하고 있는 것들이다. 장관들은 입을 열면 AI·비메모리 반도체 등 첨단 산업부터 농기자재 산업 등 전통 산업까지 육성하겠다고 말한다. 1인당 소득 3만달러,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인데 70년대식 산업정책을 아무 거리낌없이 읊는 배후엔 '정부 만능'이 마패처럼 통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육성하겠다는 산업 가운데 어느 하나 기업이 앞장서지 않은 것이 없고, 특히 성공한 산업에선 예외없이 시장에서 목숨을 건 기업들의 분투가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의 발표를 들으면 왠지 기업들은 열등하거나 혹은 악해서, 선한 정부가 이끌고 가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는 현 정부의 집권 프레임에 기인한다. 이전 두 보수 정부를 '시장 만능' 정책을 편 실패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규정하고, 촛불로 집권한 현 정부는 이를 포괄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정부 만능은 이런 착각과 오만이 빚은 잘못된 프레임에서 나온다.
MB는 재직 시절 공개적으로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집권했고, '창조경제'도 정부 주도로 할 정도로 개입 정책을 선호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한국이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았던 것도 한국의 금융이 낙후돼 신자유주의적 금융으로부터 소외됐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경제 장관조차 "신자유주의는 고사하고 우리가 언제 자유주의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냐"고 탄식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이후 한국에는 정부 주도의 경제 모델밖에 없다는 자성과 반성의 소리가 있지만, 여기엔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 집권 이후 한국 경제는 특별한 외부 쇼크가 없는데도 두 차례나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세금을 쏟아부어도 일자리가 바닥을 헤매는 경제 참사를 겪고 있다. 일류(一流)인 시장과 기업을 제치고, 삼류(三流) 정부와 사류(四流) 정치가 경제의 고삐를 쥐면서 사달이 난 것이다. 특별히 현 정부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정부에 원래 그런 비효율과 무능의 속성이 있다. 지금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고 있는 반도체 산업도 과거 정부 관료들로부터 "삼성 때문에 한국 경제가 망하게 생겼다"고 미움을 받았고, 석유화학산업도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무슨 석유
화학이냐"는 질책을 들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의 업무지시 1호로 청와대에 걸렸던 '일자리 현황판'이 현 정부의 선의라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청년 실업률과 바닥을 기는 일자리 개수는 지금의 현실이다. 정부의 실패가 이 괴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