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바깥 세상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8] 2300년 된 도로 '아피아 가도' (조선일보)

colorprom 2019. 5. 2. 15:17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8] 지중해 진출에만 500로마는 착실히 길을 닦으며 싸웠다


조선일보
                             
  • 로마·브린디시=송동훈 문명탐험가
    •          
    입력 2019.05.02 03:22 | 수정 2019.05.02 03:23

    2300년 된 도로 '아피아 가도'

    송동훈 문명탐험가

    로마는 술렁였다.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를 잇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올라온 사절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키네아스.

    그리스 테살리아 사람으로 에피루스 왕 피로스(Pyrrhus of Epirus BC 319~BC 272)의 측근이었다.

    키네아스는 '용병(用兵)의 천재'로 알려진 피로스가 제시한 강화 안(案)을 가져왔다.


    로마는 최근 헤라클레아(Heraclea)에서 피로스 왕에게 크게 졌다(기원전 280년).

    한 번의 전투에서 로마가 입은 병력 손실은 사망 7000명과 포로 2000명을 포함, 1만5000명에 달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피로스 왕의 군대는 로마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스계 도시가 많은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이 피로스 왕 편에 섰다.

    로마에 패배했던 반도 중부와 북부의 부족들도 다시 들고일어나 피로스 왕과 손잡았다.

    로마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왕이 제시한 내용은 치욕적이었지만, 승자가 먼저 패자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모양새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원로원은 주저했다. 격론이 오갔고, 국론이 분열됐다.

    이때 한 노인이 부축을 받으며 원로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령의 나이와 시력을 잃은 눈 때문에 오랫동안 국정에서 물러나 있던 전직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BC 340 ~BC 273)였다. 노인은 외쳤다.

    "강화라니! 피로스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 강화의 전제 조건이다!"

    아피아 가도 만든 원로 “결사항전” 주장 - 부축을 받으며 원로원에 들어서고 있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눈이 멀어 앞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아피우스는 피로스 왕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함으로써 강화로 기울던 원로원의 여론을 일거에 뒤집었다.
    아피아 가도 만든 원로 결사항전주장 - 부축을 받으며 원로원에 들어서고 있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눈이 멀어 앞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아피우스는 피로스 왕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함으로써 강화로 기울던 원로원의 여론을 일거에 뒤집었다. /위키피디아

    그의 열정이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불어넣었다. 원로원은 키네아스에게 '로마는 이탈리아 땅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한 결코 협상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이후 로마의 국가 원칙이 되는 유명한 대답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로마사·테오도르 몸젠). 승자(勝者)의 사절은 그렇게 패자(敗者)의 도시에서 쫓겨났다.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제국의 첫 가도(街道)를 건설하다

    키네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 이름은 아피아 가도(Via Appia). 원로원 분위기를 단숨에 뒤집은 그 눈먼 노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재무관 시절 입안하고, 건설했다. 그의 이름 '아피우스'를 따라 '아피아'다. 지금도 남아 있고, 심지어 사용되고 있다. 기원전 31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니 무려 2331년 동안 존재해 온 길이다. 옛 아피아 가도에 서면 지금도 가슴이 벅찬 이유다. 가도의 표면에는 여전히 접합 면이 딱 들어맞는 마름돌이 깔려 있고,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사이프러스가 무성하다. 로마 시대의 유적들도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비록 폐허지만 견뎌왔을 2000년의 풍상(風霜)을 생각하면 기특하다. 길은 로마와 카푸아(Capua)를 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은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당대의 카푸아는 나폴리만큼 중요했다. 반도의 남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한 이유이다.

    로마 제국, 도로 15만㎞ 건설 - 로마는 영토를 늘릴 때마다 길을 만들었고, 길을 통해 제국을 통합했다. 로마는 ‘가도의 여왕’이라 불린 아피아 가도를 시작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15만㎞의 도로를 건설했다. 도로를 건설하는 수준이 워낙 뛰어났기에 아피아 가도의 일부 구간은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로마 제국, 도로 15만㎞ 건설 - 로마는 영토를 늘릴 때마다 길을 만들었고, 길을 통해 제국을 통합했다. 로마는 ‘가도의 여왕’이라 불린 아피아 가도를 시작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15만㎞의 도로를 건설했다. 도로를 건설하는 수준이 워낙 뛰어났기에 아피아 가도의 일부 구간은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Getty Images Bank

    기원전 509년 브루투스의 혁명으로 공화국이 된 로마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성장했다. 이때에 이르러 카푸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카푸아를 지키고, 카푸아를 발판 삼아 더 남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려면 신속하게 군대를 이동시킬 가도가 필요했다. 사람과 물자를 유통시켜 로마와 카푸아를 경제-생활공동체로 만드는 것도 가도의 중요한 목표였다. 모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아이디어였다.

    피로스 왕을 몰아내다

    로마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남부 이탈리아와의 충돌을 가져왔다. 남부는 일찍부터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식민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른바 지중해에 넓게 펼쳐진 대(大)그리스 세계의 중심이었다. 로마의 출현은 이들에게 낯설고 불쾌했다. 모든 도시가 로마의 패권에 복종하느냐, 그리스 세계와 연대해 대항하느냐 기로에 섰다. 반도 남쪽에서 가장 부유한 타렌툼(Tarentum·현재 지명 타란토)은 후자를 선택했다. 장군으로서의 명성이 지중해 세계에 드높았던 피로스 왕을 초빙했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족이었던 피로스 왕은 소국(小國) 에페이로스에 만족하지 못했다. 왕은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로마는 명장(名將)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었다. 피로스 왕은 2만 명의 중무장 보병과 3000명의 기병, 20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왔다(기원전 280년 초).

    아피아 가도의 끝, 지중해 시작점에 세운 칼럼 -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인 브린디시 항구 앞에 세워진 당당한 칼럼은 이탈리아가 끝나고 지중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
    아피아 가도의 끝, 지중해 시작점에 세운 칼럼 - 아피아 가도의 종착지인 브린디시 항구 앞에 세워진 당당한 칼럼은 이탈리아가 끝나고 지중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 /Getty Images Bank

    이제 막 지중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신흥 로마와 오랜 세월 지중해를 지배해 온 그리스의 첫 충돌이었다. 피로스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로마는 총력 대응 체제에 나섰다. 로마는 물론이고 모든 복속국들과 동맹국들에 전쟁 분담금이 부과됐다. 군 복무 면제가 원칙인 무산자(無産者)들도 징집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라이비누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5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진했다. 두 세력은 타렌툼의 식민지 헤라클레아에서 격돌했다. 승리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피로스 왕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피로스 왕도 4000명의 용사를 잃었다. 로마의 병력 손실(1만5000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왕은 냉철했다. 로마의 시민군은 보완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베테랑 용병은 대체가 불가능했다. 이때의 승리를 사실상 패배로 인식한 피로스 왕은 로마에 강화 사절을 파견했다. 로마의 거절로 재개된 전쟁에서 왕의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이길수록 왕의 군대는 줄었고, 로마의 군대는 져도 줄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다

    로마는 베네벤툼(베네벤토) 근처에서 피로스 왕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기원전 275년). 왕은 이탈리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왕은 병법의 천재였지만, 로마의 결기를 꺾지는 못했다. 왕이 떠나자 타렌툼은 항복했다. 외부의 힘에 기대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자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타렌툼이 굴복하자 함께 손잡고 로마에 대항했던 삼니움과 루카니아도 항복했다. 기원전 270년, 마침내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했다. 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새로운 요새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반도를 하나로 잇기 위해 도로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아피아 가도는 카푸아에서 베네벤툼, 타렌툼을 거쳐 브룬디시움(브린디시)으로 이어졌다. 가도의 종점에 로마는 거대한 칼럼 두 개를 세웠다. 오늘날 하나는 남았고, 하나는 사라졌다.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외로이 우뚝 솟은 칼럼! 예나 지금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500년 가까이 걸려 그리스 세계의 문턱에 섰을 때 로마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이를 위한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기 직전이란 걸 스스로는 알았을까?

    옛 브룬디시움 항구는 쇠락했지만 바람만은 여전히 세차다. 지금은 그저 바람일 뿐이지만, 로마에서 시작된 길이 여기서 끝났을 때 불었던 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지중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었다. 역사는 그렇게 누구도 깨닫지 못하는 동안 구르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예수 만나고… 스파르타쿠스 반란 노예 6000명 못박아 세운 길
    아피아 가도는 로마 역사의 상징

    아피아 가도 지도

    아피아 가도는 제국 로마의 상징이다. 로마에서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Brindisi)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통해 그리스로, 그리스를 통해 동부 지중해 전역으로 뻗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이기도 하다. 제정 초기에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다 예수와 만난 것이 이 길 위에서였다. 로마를 향하는 예수에게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라 물었고,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가느니라"라는 답을 들었다.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는 로마로 되돌아갔고, 기독교인들과 함께 죽었다. 공화정 말기에 대규모 노예 봉기였던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력으로 노예를 진압한 크라수스 장군은 6000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아피아 가도에 세웠다. 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던지는 경고였다. 역시 공화정 말기에 로마의 권력을 두고 귀족파와 평민파가 싸웠던 내전에서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가기 위해 선택했던 길도,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기 위해 카이사르가 간 길도 이 길이었다. 훗날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을 추격해 그리스로 넘어가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진군한 길도 아피아 가도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2/20190502003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