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아키히토 일왕의 모친인 나가코 왕대비가 사망했다.
무려 17가지 행사의 장례 의식이 40일에 걸쳐 치러졌다.
일본 언론은 모든 행사를 보도했지만 왕궁 신도(神道)식 제사만큼은 취재진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이 이뤄졌다는 추측만 있었을 뿐이었다.
일왕가(家)는 몇 안 되는 세계의 왕실 중에서도 가장 비밀에 싸인 곳이다.
▶일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신도라는 국가 종교의 최고 제사장이다.
그가 집전하는 수십 가지 제례 중에서도 '다이죠사이(大嘗祭)'로 불리는 제사는
가장 미스터리한 비의(祕儀)로 꼽힌다.
왕궁의 깊숙한 방에서 일왕 혼자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구전(口傳)으로만 전수돼온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인신(現人神)으로 군림하던 일왕은
1946년 히로히토 일왕이 신격(神格)을 부정하는 '인간 선언'을 하면서 땅으로 내려왔다.
그래도 여전히 베일이 걷히지 않고 있다.
▶단군신화엔 환웅이 천제(天帝)에게 받았다는 천부인(天符印), 즉 청동검·거울·방울이 나온다.
우리는 신화적 상상이지만 일본엔 전설 속의 '3종 신기(神器)'가 실물로 존재한다.
건국의 여신 아마테라스가 건네주었다는 칼·곡옥(曲玉)·거울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 세 가지를 폭력·돈·지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왕가는 이를 천손(天孫)의 증거라고 일컬으며 대대로 승계해왔다고 주장한다.
▶어제 즉위한 나루히토(德仁) 일왕도 '3종 신기'를 물려받음으로써 왕권 계승을 공식화했다.
아키히토 선왕 퇴위식엔 세 가지 중 검과 곡옥이 등장했는데, 커버로 씌워져 실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수천년간 존재했다는 '3종 신기'는 단 한 번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12세기 내전 때 수장(水葬)됐다는 추측과 함께 심지어 일왕조차 보지 못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일본 왕실은 고대 신화와 종교, 신비주의가 범벅된 불가사의한 존재다.
▶한 프랑스 기호학자는 일왕을 가리켜 '모든 것이 그 주위를 도는 신성한 무(無)'라고 표현했다.
빈 구멍처럼 실권 없는 존재지만 온 일본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일왕에 대한 일본인의 충성심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일본인의 혐한(嫌韓) 감정이 촉발된 것도 한국에서 일왕의 사과 요구가 나왔을 때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질서정연하면서도 속으로는 복잡하고 이상한 나라와 잘 지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