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클림트 떠난 지 100년… 혜성처럼 떠올라 불멸의 예술가로
거리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치게 된다. 각종 포스터가 현란할 정도로 붙어있어서 '그'를 피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키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다. 지금 빈은 '클림트의, 클림트에 의한, 클림트를 위한' 도시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클림트로 충만하다.
올해는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0년 되는 해다. 클림트의 힘을 아는 빈은 세심하게 2018년을 준비했다. 레오폴트 뮤지엄은 'Artist of the Century(세기의 예술가)'란 제목의 클림트 특별전을 마련했다. 응용미술박물관(MAK)은 '클림트의 마법정원(Klimt's Magic Garden)'을 선보이고 있다. 분리파 회관은 몇 개월에 걸친 외부 청소를 끝내고 깔끔한 모습으로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보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오는 팬들을 맞이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클림트의 본가(本家)인 벨베데레(Belvedere)에 가면 '키스(Kiss)'와 '유디트(Judith)'가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올해 클림트를 가장 인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빈을 대표하는 미술사박물관(KHM·Kunst Historisches Museum)이다. KHM은 'Stairway to Klimt(클림트에 이르는 계단)'란 아주 특별한 선물을 기획했다. 이 기획은 KHM의 메인 홀 중앙에 거대한 임시 계단, 일명 '클림트 다리'를 설치해 클림트가 그린 벽면화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벽면화의 아름다움은 12m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와는 차원이 다른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세기말의 빈을 살다간 대단한 화가였다. 천재라는 표현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빈은 말 그대로 예술의 도시다. 회화는 물론 건축, 조각, 디자인, 음악, 문학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세계적인 인물들을 무수히 배출했다. 그런데 빈 시민도, 여행객들도 유독 클림트에 열광한다.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혜성처럼 떠오르다
클림트는 1862년 가난한 금(金)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과 금에 대한 관심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클림트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특히 발군의 드로잉 실력을 인정받아 빈의 공예미술학교에 입학했다(1876년). 학교에서도 클림트는 친구 프란츠 마츠(Matsch)와 함께 돋보였다. 교수들은 아직 학생인 두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당대 미술계의 거장이며 클림트의 롤모델이었던 한스 마카르트(Makart)는 이들을 조수로 쓰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클림트는 마츠, 친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예술가 회사)'를 만들어 미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예술가로 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1888년에 찾아왔다.
링슈트라세 중심에 위치한 부르크 극장의 천장화 일부를 의뢰받은 것이다. 이 극장은 오스트리아 공연 예술의 요람이었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재정을 지원하는 곳이었다. 당시로써는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는 프로젝트였다. 클림트는 자신이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냈다. 황제는 크게 기뻐했고 클림트에게 황금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성공은 또 다른 기회를 불러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대한 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지고 있는 미술사박물관의 벽면을 그리는 작업이 주어진 것이다. 이 또한 대성공이었다. 연이은 성공으로 부와 명성이 따라왔다. 그는 아직 서른 전이었다.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클림트는 여행을 떠났다. 넓은 세상은 새로운 안목을 화가에게 안겼다. 특히 클림트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맹목적으로 따랐던 빈 미술계의 전통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과거의 역사만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가? 왜 화풍은 옛 전통을 따라야만 하는가? 왜 세계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은 빈에 소개되지 않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클림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변화였다. 새로움이었다. 자신만의 개성이었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자신을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예술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빈 미술계를 지배하던 '미술가 연맹'이 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클림트는 자신도 속해 있는 이 단체 안에서 변화를 시도했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미술가 연맹은 클림트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검열이란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클림트와 동료들은 연맹을 탈퇴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분리파(Sezession)'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1897년). 클림트는 분리파의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분리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인 분리파 회관의 건립도 진두지휘했다. 분리파 회관은 외관과 내부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함으로써 빈의 다른 건물들과 차별화했다.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자신들의 모토를 달았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는 클림트 예술의 정수(精髓)이기도 했다.
공공예술과 결별하다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북이탈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유럽의 대표적인 다민족국가였다. 19세기에 깨어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의 존립을 위협했다. 분리파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조화, 균형, 통합을 추구했다. 제국의 비전과 일치했다. 제국 정부가 분리파를 후원한 이유다. 클림트에게 빈 대학 본관 건물의 천장화 중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긴 까닭이기도 하다. 클림트는 과감하게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버렸다. 대신 모호한 상징, 난해한 이미지, 과도한 누드로 천장화를 채웠다.
지성의 전당(殿堂)은 경악했다. 자신들의 철학은 명확하고, 의학은 신성하며, 법은 정의 그 자체였다. 그런데 클림트의 작품에 나타난 철학은 모호하고, 의학은 불순하며, 법은 폭력에 불과했다. 클림트는 예언자처럼 20세기에 펼쳐질 극단과 광기의 시대, 폭력과 위선의 세계를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이성적이며 문명은 진보한다'고 믿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클림트의 작품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격렬한 반대와 논쟁이 제국의 수도를 강타했다. 자유주의자들끼리의 분열이었다.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에 맞서 제국을 통합해야 하는 정부에 자유주의 진영의 분열은 치명타였다. 결국 정부는 클림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클림트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통해 대학 천장화 3부작을 사들이고, 다시는 정부의 작품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905년).
황금빛 불멸로 도피하다
클림트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대중 예술가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철학적이고 우의적인 그림 대신, 에로틱하고 화려하며 관능적인 여인의 초상과 인상주의적인 풍경으로 도피했다. 클림트의 가치를 아는 소수의 세련된 상류 계층 부자들이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기 위해 줄을 섰다. 클림트는 1903년에 동로마제국의 황금빛 모자이크 예술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를 두 차례 방문했다.
여행은 천재에게 황금이라고 하는 재료와 모자이크라고 하는 표현 방식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 줬다. 금세공사의 아들은 이제 자신의 작품에 황금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 '키스'(1907~1908년)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1907년)는 이 시기에 탄생했다. 클림트는 1918년 2월 6일 평생의 동반자였던 에밀리 플뢰게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딱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클림트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미술사박물관의 임시 관람대는 그의 벽면화를 눈앞에서 보기 위해 찾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가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다. 나란히 그려져 있는 클림트의 친구 마츠의 작품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없다. 비전문가의 눈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비정하다. 벽면화보다 더 중요한 중간 천장화에 주목하는 사람도 없다.
너무나 잘 그려진 16개의 중간 천장화는 모두 클림트의 스승 마카르트의 작품이다. 서글프다. 왜 마카르타와 마츠는 잊혔고, 클림트만 기억될까? 클림트만이 용기 있게 과거의 틀을 깨고 자신의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올해 빈과 빈을 찾는 수많은 사람이 클림트에게 열광하는 이유다.
'키스'만큼 사랑받는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억3500만달러에 팔려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키스'다. 한때는 키스와 쌍벽을 이룬 작품이 있다.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 불린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한 여인의 초상화다. 원래 이름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 모델이자 원소유주가 유대
인이란 이유로 나치에 빼앗겨 키스와 나란히 벨베데레에 걸려 있었다. 2006년 블로흐-바우어 가문의 상속녀가 8년의 법정 투쟁 끝에 그림을 되찾았다.
그녀는 같은 해 글로벌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 창업자의 아들에게 1억3500만달러라는 천문학적 가격에 그림을 팔았다. 지금은 뉴욕의 노이에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 '우먼 인 골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