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2.26 03:13
재불(在佛) 번역가 김성혜씨는 청력이 불편하다. 보청기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쉽지 않다. 독립운동가 서영해(1902~?)가 1929년 프랑스어로 쓴 역사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éenne)' 번역을 의뢰받고 처음에 망설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번역은 귀가 아니라 눈과 손으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출판사와 원고를 주고받거나 수정하고 책으로 펴내기 위해서는 실시간 의사소통이 필수적이다. 게다가 올해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한글판 출간도 잡혀 있었다. 빠듯한 일정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씨가 마음을 돌린 계기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서영해의 유려한 불어 문장이었다. 김씨는 "100년 전 문장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구사하는 어휘도 품격이 있었다"고 했다. 서영해의 이 책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임시정부 수립 등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유럽 전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김씨의 번역으로 이 책은 프랑스 출간 90년 만에 한국에서도 빛을 보았다.
서영해는 3·1운동에 참가하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에는 임정 파리 통신원과 주불 대표 위원 등 유럽 외교 활동을 담당했다. "미주위원부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파리의 이승만'인 셈이다. 실제 이승만과 서영해는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본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숙식을 함께하며 활동했다.
최근 '서영해 재조명'에 발 벗고 나선 연구자는 또 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정상천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운영지원과장도 평전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펴냈다. 유럽에 남아 있는 후손들이 서영해의 업적을 뒤늦게 알게 된 과정을 담은 이 책의 초반부는 '또 한 편의 드라마'다. 이제는 '잊힌'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서영해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서영해처럼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일수록 재조명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본명과 일제 검거를 피하기 위한 가명(假名), 외국식 이름까지 뒤섞여 있다 보니 동일 인물이라는 걸 파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만주·러시아 일 대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박환 수원대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충분히 사정이 이해됐다.
언젠가부터 독립운동사가 이념적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면서 벅찬 감동보다는 피로감을 안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말이 뒤집혀선 안 된다.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조국의 후손들 아닌가. 마땅히 재조명받아야 할 '파리의 이승만'은 아직도 많다.
하지만 김씨가 마음을 돌린 계기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서영해의 유려한 불어 문장이었다. 김씨는 "100년 전 문장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구사하는 어휘도 품격이 있었다"고 했다. 서영해의 이 책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임시정부 수립 등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유럽 전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김씨의 번역으로 이 책은 프랑스 출간 90년 만에 한국에서도 빛을 보았다.
서영해는 3·1운동에 참가하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간 뒤에는 임정 파리 통신원과 주불 대표 위원 등 유럽 외교 활동을 담당했다. "미주위원부에 이승만이 있다면 유럽에는 서영해가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파리의 이승만'인 셈이다. 실제 이승만과 서영해는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본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숙식을 함께하며 활동했다.
최근 '서영해 재조명'에 발 벗고 나선 연구자는 또 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정상천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운영지원과장도 평전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펴냈다. 유럽에 남아 있는 후손들이 서영해의 업적을 뒤늦게 알게 된 과정을 담은 이 책의 초반부는 '또 한 편의 드라마'다. 이제는 '잊힌'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서영해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서영해처럼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일수록 재조명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본명과 일제 검거를 피하기 위한 가명(假名), 외국식 이름까지 뒤섞여 있다 보니 동일 인물이라는 걸 파악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만주·러시아 일 대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박환 수원대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충분히 사정이 이해됐다.
언젠가부터 독립운동사가 이념적 정쟁(政爭)의 대상이 되면서 벅찬 감동보다는 피로감을 안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말이 뒤집혀선 안 된다.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이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조국의 후손들 아닌가. 마땅히 재조명받아야 할 '파리의 이승만'은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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