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김정탁(65ㆍ신문방송학) 교수를 만났다.
- ‘장자’, 한마디로 어떤 인물인가.
장자는 가장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개인의 행복’을 말한 유일한 사상가였다.
다른 학자들은 구국강병을 말했다. 법가(法家)와 병가(兵家)가 그랬다.
진시황이 법가와 병가를 채택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지 않았나.
또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는 너무 인위적인 도덕으로 사람을 묶었다.
예를 들면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가 그런 거다.
생각해보라. ‘인ㆍ의ㆍ예ㆍ지’를 지킨다고 인간이 과연 행복해지겠나.”
- 도덕이 없다면 삶의 기준도 없어지지 않나. 그럼 ‘장자’에는 도덕이 없나.
자연을 보라. 자연에 ‘인ㆍ의ㆍ예ㆍ지’같은 도덕이 있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굉장히 편안해지지 않나, 행복해지지 않나.
장자가 말하는 도덕은 이런 도덕이다. 자연스러운 거다. 인위적이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 자연적 도덕을 이미 가지고 있다.”
김 교수는 “인위적인 도덕을 너무 강조할 때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 동그라미를 끝없이 깎는다는 게 뭔가.
“가령 둥근 원(圓)이 있다.
인위적인 도덕, 인위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원을 더욱 둥글게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순도 100%의 원을 추구한다. 그걸 위해 동그라미를 계속 깎아 나간다.
결국 어떻게 되겠나. 모가 생기고 만다.
완벽한 동그라미를 만들려고 하다가 오히려 모가 나는 꼴이다.
조선의 당파 싸움도 그랬다.
노론은 순도 100%를 추구했다. 그래서 상대방을 끝없이 공격했고, 상대방 의견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모가 났다.
진정 정의로운 사람은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 그럼 뭐라고 말을 하나.
“그냥 자신의 삶으로 드러날 뿐이다.
얼마 전 청와대 대변인이 ‘문재인 정부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게는 ‘우리 정부는 애초에 정의롭다’는 말로 들렸다.
진정 정의로운 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장자적 관점을 가진 내게는 무척 안타까운 대목이었다.”
김 교수는 ‘법(法)’이란 글자를 한자로 썼다.
- 큰 시시비비가 뭔가.
“전체와의 균형이다.
이제는 ‘합리적 사회(rational society)’에서 ‘화리(和理)적 공동체(community)’로 옮겨가야 한다. ”
- ‘장자’의 심장을 딱 한 글자로 꼽으면.
“‘놀 유(遊)’다.
『장자』는 ‘내편(內篇)’‘외편(外篇)’‘잡편(雜篇)’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내편’은 장자의 직설로 본다.
그 ‘내편’의 첫째편 제목이 ‘소요유(逍遙遊)’다.
‘외편’의 마지막이 ‘지북유(知北遊)’다.
유(遊)에서 시작해 유(遊)로 끝난다.
장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건 ‘유(遊)’다. 다시 말해 유유자적한 노님이다.
중국 미학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이 ‘유(遊)’다.”
- ‘유(遊)’는 일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건가.
“아니다.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유(遊)’다.
원래 인간의 노동은 신성했다. 자연과 인간을 잇는 매개였다.
산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의 개념이 왜곡됐다.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노동은 자연과 인간을 매개하는 것으로서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노동은 ‘나’를 구현해가는 수단이다.
이게 산업시대에 들어와 ‘먹고 사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노동(Labor)’이 ‘워크(Workㆍ일)’가 되고 말았다.”
- ‘노동’이 ‘워크’가 되면 어찌 되나.
“산업시대의 워크에는 ‘자기 영혼’이 없다. 자기 영혼이 없으니 자아실현도 없고, 자기 만족도 못 한다.
그래서 대중예술이 등장했다.
‘너, 돈 많이 줄 테니까 보람은 찾지마. 대신 자아실현을 통한 만족감은 영화 같은, 다른 데서 찾아봐.’
결국 인간은 자기 내면을 통한 만족을 찾지 못하고, 대중예술을 통한 타자화된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 타자화된 만족, 문제가 있나.
“그런 만족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원히 목마르다. 인간은 결국 일을 하면서 끝없이 소외당하고 만다.”
김 교수는 산업시대의 ‘워크’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고 했다.
- ‘장자’는 꿈결 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상당히 현실적이다.
- “‘장자’는 100% 순도, 100%의 완성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 순도가 70%여도 좋다. 다만 이게 일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실천적이다.
- ‘장자’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모순투성이의 일상을 중시한다.
- 『장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면 아파서 울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리면 아파서 운다.’
- 무슨 뜻인가. ‘자연의 결’을 따라서 살라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비틀스의 존 레넌 일화를 꺼냈다.
김 교수는 우리는 모두 이 물음 앞에 서 있다고 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장자』의 ‘외편’ 중 산목(山木)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느닷없이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쿵!’하고 충돌했다.
다시 강을 건너가는데 또 다른 배가 와서 ‘쿵!’하고 부딪혔다. 이번에도 배가 출렁했다.
배를 타고 한참 가던 그는 의문이 생겼다.
김정탁 교수는 ‘빈 배’ 일화에 담긴 메시지를 짚었다.
“우리가 만날 화를 내는 이유가 뭔가. 상대방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우리에게 ‘상대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한번 살아보라’고 말한다.
그렇게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비워진다. 화를 낼 일도 없어진다. 상대가 없으니까.”
김 교수는 장자의 이런 메시지를 한 글자로 표현했다. ‘허(虛)’. 비어 있다는 뜻이다.
“불교의 공(空)은 절대적 개념이다. 일반 사람이 다가서기 쉽지 않다.
반면 장자의 ‘허(虛)’는 상대방을 두고 들어간다. 더 쉽고, 더 구체적이다.
그게 ‘장자’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