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크리스마스'
정적(靜寂)을 깨고 맞은편 영국군 진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느낌으로 안다.
이 사건을 영화로 옮긴 게 '메리 크리스마스(2005년 개봉)'다.
영화 속 시한부 휴전은 다음 날에도 이어진다. 시신을 수습하고 축구 경기까지 벌였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은 이때부터 일어났다.
적군 참호를 포격한다는 소식에 독일군 장교가 프랑스 장교에게 자기네 진지로 피신하라고 제의한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이 독일군 포격을 피해 독일군 참호로 대피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쯤 되면 이미 전쟁터가 아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너무 나간 거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다. 다만 특정 지역에서 한꺼번에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다.
영화는 전선(戰線) 여러 곳에서 있었던 매우 전쟁 같지 않은 에피소드를 모아 하나로 엮었다.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
참전한 병사 중에 우연히 성악 전공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전방 공연을 온 '키르치호프'라는 이름의 성악가가 있었다.
그가 노래를 불렀고 마침 프랑스군 장교 중에 음악 애호가가 있어 키르치호프를 알아봤다.
어차피 부르는 노래, 자기들도 감상하게 해 달라 부탁했고 이게 작은 음악회로 이어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예전 전쟁은 왕조(王朝) 대 왕조, 정부(政府)와 정부의 대결이었다.
그게 국민 사이의 대결로 바뀐 것이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인 1차 세계 대전이다.
그러나 프랑스 시골 농부와 독일 산골 대장장이가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없는 증오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국은 사전 작업을 벌였다.
프랑스 공립 교육 장관은 8세 이상 소년들에게 실탄을 장전한 사격 훈련을 지시했다.
사제는 미사 강독에서 타 종족 몰살을 주장했고 아이들은 웅변대회에서 여자들 목을 베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처음 하는 총력전이다 보니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관대했던 것이 크리스마스 정전(停戰)이라는 이벤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비공식 휴전'은 병사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비교적 검열이 느슨했던 영국에서는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정부는 어떻 게 대응했을까.
처형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대신 사고 친 부대들을 격전 지역으로 배치했다.
죽거나 전쟁의 공포로 입을 다물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대부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됐다.
역사는 '인간이 인간이었던 시대'와 '인간이 인간이 아니었던 시대'로 나뉜다.
크리스마스의 정전은 인간이 인간이었던 시대를 증언하는 한 장의 스냅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