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2.22 03:00
[아무튼, 마이웨이] 가회동 빈센트·우노초이 부부
![핑크 책상, 노란 벽…. 60대 감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빈센트(오른쪽)·우노 부부의 가회동 한옥. 부부는 모든 게 반대다. 키 큰 아내는 무채색 옷을 고수하고, 아담한 남편은 파스텔톤 옷을 좋아한다.](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12/21/2018122101662_0.jpg)
#1. 이 여자 우노 초이(한국명 최은생·62). 서울 서대문의 약국집 첫째 딸로 태어나 1975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1980~90년대 베벌리힐스에서 잘나가는 패션모델이었다. 미국 통신회사 AT&T TV 광고 모델까지 했다. 다시 주목받은 건 지난해 배우 김희선과 출연한 화장품 브랜드 랑콤의 캠페인 광고. 20~30대 못지않은 세련된 이미지로 한국판 '뉴 식스티(new sixty·멋쟁이 60대)' 바람을 몰고 왔다.
#2. 이 남자 빈센트 이(Yee·66). 중국계 미국 군무원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를 둔 미국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하와이, 홍콩 등지를 오가며 자랐다. 명문 코넬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MBA를 거쳤다. 젊은 시절 미국 방위산업체 '제너럴다이내믹스'에서 잠수함을 만들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도 일했다.
이 여자, 이 남자가 만난 건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의 한 아파트. "짙은 화장에 커다란 가방 들고 다녀 화장품 방문 판매원인 줄 알았던" 앞집 여자, "집에 틀어박혀 뚝딱뚝딱 늘 무언가 만들던 작달막한" 앞집 남자였다. 물과 기름 같던 이웃 남녀는 1994년 부부가 됐다.
미국에서 화려하게 젊음을 보낸 부부는 2년 전 은퇴하고 한국에 정착했다. 그것도 가장 한국적인 동네인 서울 가회동 한옥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닮은꼴 삶이 넘치는 한국에서 색다른 은퇴자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한땐 쓸모 있는 인간이었는데…'류의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60대에 '쓸모 있는 노년'을 개척한다는 것. 이들 이야기는 최근 책 '쓸모인류'(몽스 북)로도 출간됐다. 가회동에서 '뉴 식스티'의 삶을 전파하는 별종 부부를 만났다.
―왜 종착역으로 한국을 선택했나요.
우노(이하 우): "둘 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릴 적 한국을 떠났어요. 3년 전 어머니가 세상 뜨신 뒤 자연스레 인생의 뿌리로 돌아왔어요. 때마침 친구가 이 한옥을 장기 임대해줬고요." 꽁지 머리를 한 남편 빈센트가 끼어든다. "그렇게 저질러 놓은 거 수습하려 내가 온 거고. '경찰' 노릇 하러(웃음)."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는 이 부부의 집에서 빛을 발한다. 외관은 이웃집과 비슷한데 대문 열면 '색채의 마술사'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떼다 놓은 듯 파스텔톤 세상이 펼쳐진다. 연두색 소파, 핑크 책상, 샛노란 벽…. 60대가 사는 집이라곤 믿기 어려운 감각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바닥에 모자이크 타일로 수놓은 글씨가 눈에 띈다. '아폴로니아'. "고대 그리스에 있던 철학자의 도시였지요. 누구든지 사색하며 편히 머물다 갔으면 해서 붙인 이름이에요."
―집 고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요.
빈센트(이하 빈): "이 집에서 100년 살 각오로 고쳤어요. 철저히 쓰임을 계산해서 만들었어요. 전 300살까지 살 거거든요(웃음).
―300살요? 막 '100세 시대' 열렸는데.
빈: "진짜 300살 산다는 건 아니에요. 마음속 인생의 결승선을 멀찌감치 그어 놓고 여유 있게 나이 들자는 겁니다. 한국의 은퇴자들은 즐기는 것조차 체할 정도로 급해요. 여든까지, 100세까지 산다 하니 남은 세월이 많지 않다면서 조바심 내 '빨리' 즐기려 드니까요. 정작 즐기는 법은 모르면서."
―왜 잘 못 즐길까요.
빈: "첫 50년 사는 법은 학교에서 배우는데 50 이후의 삶은 배우지 않았어요.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취향이 중요한데 자기 취향을 몰라요. 연습을 안 했으니. 50 이후를 가르쳐 주는 '퇴직 초등학교'가 필요해요."
―집이 두 사람에겐 취향의 결정체 같습니다.
우: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 저희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타일에 꼭 맞춰 살려 해요. 임대주택이라고 대충 살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비싼 가구 사는 게 아닙니다. 중고나 버려진 가구를 주워 나한테 맞게 고쳐 써요."
#2. 이 남자 빈센트 이(Yee·66). 중국계 미국 군무원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를 둔 미국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하와이, 홍콩 등지를 오가며 자랐다. 명문 코넬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MBA를 거쳤다. 젊은 시절 미국 방위산업체 '제너럴다이내믹스'에서 잠수함을 만들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도 일했다.
미치도록 핫하다, 정몰
미국에서 화려하게 젊음을 보낸 부부는 2년 전 은퇴하고 한국에 정착했다. 그것도 가장 한국적인 동네인 서울 가회동 한옥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닮은꼴 삶이 넘치는 한국에서 색다른 은퇴자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도 한땐 쓸모 있는 인간이었는데…'류의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하는 60대에 '쓸모 있는 노년'을 개척한다는 것. 이들 이야기는 최근 책 '쓸모인류'(몽스 북)로도 출간됐다. 가회동에서 '뉴 식스티'의 삶을 전파하는 별종 부부를 만났다.
―왜 종착역으로 한국을 선택했나요.
우노(이하 우): "둘 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릴 적 한국을 떠났어요. 3년 전 어머니가 세상 뜨신 뒤 자연스레 인생의 뿌리로 돌아왔어요. 때마침 친구가 이 한옥을 장기 임대해줬고요." 꽁지 머리를 한 남편 빈센트가 끼어든다. "그렇게 저질러 놓은 거 수습하려 내가 온 거고. '경찰' 노릇 하러(웃음)."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는 이 부부의 집에서 빛을 발한다. 외관은 이웃집과 비슷한데 대문 열면 '색채의 마술사'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떼다 놓은 듯 파스텔톤 세상이 펼쳐진다. 연두색 소파, 핑크 책상, 샛노란 벽…. 60대가 사는 집이라곤 믿기 어려운 감각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바닥에 모자이크 타일로 수놓은 글씨가 눈에 띈다. '아폴로니아'. "고대 그리스에 있던 철학자의 도시였지요. 누구든지 사색하며 편히 머물다 갔으면 해서 붙인 이름이에요."
―집 고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요.
빈센트(이하 빈): "이 집에서 100년 살 각오로 고쳤어요. 철저히 쓰임을 계산해서 만들었어요. 전 300살까지 살 거거든요(웃음).
―300살요? 막 '100세 시대' 열렸는데.
빈: "진짜 300살 산다는 건 아니에요. 마음속 인생의 결승선을 멀찌감치 그어 놓고 여유 있게 나이 들자는 겁니다. 한국의 은퇴자들은 즐기는 것조차 체할 정도로 급해요. 여든까지, 100세까지 산다 하니 남은 세월이 많지 않다면서 조바심 내 '빨리' 즐기려 드니까요. 정작 즐기는 법은 모르면서."
―왜 잘 못 즐길까요.
빈: "첫 50년 사는 법은 학교에서 배우는데 50 이후의 삶은 배우지 않았어요. 인생 후반전으로 갈수록 취향이 중요한데 자기 취향을 몰라요. 연습을 안 했으니. 50 이후를 가르쳐 주는 '퇴직 초등학교'가 필요해요."
―집이 두 사람에겐 취향의 결정체 같습니다.
우: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 저희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하루를 살더라도 내 스타일에 꼭 맞춰 살려 해요. 임대주택이라고 대충 살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비싼 가구 사는 게 아닙니다. 중고나 버려진 가구를 주워 나한테 맞게 고쳐 써요."
![지난해 랑콤 ‘러브 유어 에이지’ 캠페인 광고에 등장한 우노 초이.](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12/21/2018122101662_1.jpg)
수처작주에 뒤따르는 말은 입처개진(立處皆眞·서 있는 곳이 참되다). 집의 참된 주인이 될 때, 그 집은 참된 공간이 된다.
집 자체가 빈센트에겐 공방이다. 효율적인 공간 디자인의 정수인 잠수함을 설계해 본 경험을 살렸다. 싱크대, 세제 박스, 양념통 찬장까지 직접 디자인해 을지로 철물공장을 돌며 스테인리스 가구를 짜 맞췄다. 제집 드나들 듯하다가 공장 직원들과 막역해져 집들이에도 초대했다. 장가간다는 20대 직원에겐 축의금도 건넸다.
―한국 집에 가보니 어떻던가요.
빈: "멋진 집은 많은데 온기 있는 집은 드물어요. 하나같이 번쩍번쩍 대리석 깔아놓고 가죽 소파 두더군요. '우리 집은 부잣집이야' 으스대는 것 같아요. 제 눈엔 무미건조한 사무실이나 병원 같은데. 집은 '보여주는 집'이 아니라 '쓰는 집'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쓴다는 거죠?
빈: "우리 부부 단골집은 우리 집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 수시로 만나 시시콜콜한 얘기할 아지트가 필요해요. 우리한텐 집이 아지트예요. 주변을 보면 비싼 집에서 TV 보고 잠만 자요. 멀쩡한 집 놔두고 카페 가서 일하고 쉬어요. 왜 집을 소유하는 데만 관심 쏟고, 집에 생기 불어넣는 건 고민하지 않지요?"
우: "우리 집은 '한바탕 사람들이 쓸고 지나가는 곳'이에요. 친구들이 지나가다 언제든 들를 수 있는, 문턱 없는 집이에요." 진짜 문턱 없는 집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한옥을 개조하면서 문턱을 다 없앴다. '액면'은 젊어 보이지만 그들도 노년을 향해 가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질 때를 미리 대비했다.
―두 사람 외모도, 성격도 참 다릅니다.
우: "나는 젓가락, 남편은 숟가락. 같은 밥상 위에 있지만 용도가 달라요. 숟가락 움직일 땐 젓가락은 쉬면서 좀 기다려 줘야 하고요. 사실 부부 사이엔 뭘 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중요할 때가 많잖아요." 남편더러 '좁쌀영감', 아내더러 '깔깔깔 어린애'라며 티격태격하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자식이 없기 때문에 '쿨한' 노년이 가능한 건 아닌가요.
우: "저는 재혼, 남편은 초혼이었어요. 아이는 낳지 말고 남의 아이를 우리 아이처럼 생각하자 했어요. 쿨해 보이는 건 글쎄요. '시간에 매달리지 말자, 나잇값 하지 말자'는 우리의 지론 때문인 듯해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도 들립니다.
빈: "일반적이진 않지요.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어요. 그게 어른이라 생각했어요."
―어른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요.
빈: "생각을 신중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어른은 집사(butler)하고 비슷해요. 집사는 집 안팎의 자질구레한 문제 처리부터 사람들 요구를 감안해서 한 집안을 유지·관리하지요. 사려 깊고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말만 어른이 아니라 행동하는 어른이라면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에선 '어른은 없고 꼰대만 있다' 하고, 장년층에선 '노인을 무시한다'고 합니다.
빈: "과거의 경험은 미래의 비료입니다. 그런데 구세대는 과거에 얽매여 있고, 신세대는 이전 세대의 경험을 구닥다리라 생각해요. 서로 지혜가 있다면 앞도, 뒤도, 옆도 봐야지요."
―나이 드는 게 서글프진 않나요.
우: "전혀. 나이 먹는 건 특권이라 생각해요. 아직 인생이란 장편 영화의 초반만 본 젊은이들에게 느긋하게 얘기해 줄 수 있잖아요. '뒷부분까지 보니까 이런저런 장면들이 있더라고. 너무 슬퍼하지도 서두르지도 마.'"
부부의 별명은 빈센트와 우노를 줄인 '비노(vino)'. 우연일까, 이탈리아어로 'vino'는 와인이다. 1950년대 빈티지를 지닌 두 인생. 60여 년 숙성한 이들 삶의 풍미(風味)는 결코 가볍지도, 지나치게 묵직하지도 않다.
집 자체가 빈센트에겐 공방이다. 효율적인 공간 디자인의 정수인 잠수함을 설계해 본 경험을 살렸다. 싱크대, 세제 박스, 양념통 찬장까지 직접 디자인해 을지로 철물공장을 돌며 스테인리스 가구를 짜 맞췄다. 제집 드나들 듯하다가 공장 직원들과 막역해져 집들이에도 초대했다. 장가간다는 20대 직원에겐 축의금도 건넸다.
―한국 집에 가보니 어떻던가요.
빈: "멋진 집은 많은데 온기 있는 집은 드물어요. 하나같이 번쩍번쩍 대리석 깔아놓고 가죽 소파 두더군요. '우리 집은 부잣집이야' 으스대는 것 같아요. 제 눈엔 무미건조한 사무실이나 병원 같은데. 집은 '보여주는 집'이 아니라 '쓰는 집'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쓴다는 거죠?
빈: "우리 부부 단골집은 우리 집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친구들 수시로 만나 시시콜콜한 얘기할 아지트가 필요해요. 우리한텐 집이 아지트예요. 주변을 보면 비싼 집에서 TV 보고 잠만 자요. 멀쩡한 집 놔두고 카페 가서 일하고 쉬어요. 왜 집을 소유하는 데만 관심 쏟고, 집에 생기 불어넣는 건 고민하지 않지요?"
우: "우리 집은 '한바탕 사람들이 쓸고 지나가는 곳'이에요. 친구들이 지나가다 언제든 들를 수 있는, 문턱 없는 집이에요." 진짜 문턱 없는 집이기도 하다. 빈센트는 한옥을 개조하면서 문턱을 다 없앴다. '액면'은 젊어 보이지만 그들도 노년을 향해 가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질 때를 미리 대비했다.
―두 사람 외모도, 성격도 참 다릅니다.
우: "나는 젓가락, 남편은 숟가락. 같은 밥상 위에 있지만 용도가 달라요. 숟가락 움직일 땐 젓가락은 쉬면서 좀 기다려 줘야 하고요. 사실 부부 사이엔 뭘 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중요할 때가 많잖아요." 남편더러 '좁쌀영감', 아내더러 '깔깔깔 어린애'라며 티격태격하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자식이 없기 때문에 '쿨한' 노년이 가능한 건 아닌가요.
우: "저는 재혼, 남편은 초혼이었어요. 아이는 낳지 말고 남의 아이를 우리 아이처럼 생각하자 했어요. 쿨해 보이는 건 글쎄요. '시간에 매달리지 말자, 나잇값 하지 말자'는 우리의 지론 때문인 듯해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도 들립니다.
빈: "일반적이진 않지요.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어요. 그게 어른이라 생각했어요."
―어른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요.
빈: "생각을 신중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어른은 집사(butler)하고 비슷해요. 집사는 집 안팎의 자질구레한 문제 처리부터 사람들 요구를 감안해서 한 집안을 유지·관리하지요. 사려 깊고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말만 어른이 아니라 행동하는 어른이라면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에선 '어른은 없고 꼰대만 있다' 하고, 장년층에선 '노인을 무시한다'고 합니다.
빈: "과거의 경험은 미래의 비료입니다. 그런데 구세대는 과거에 얽매여 있고, 신세대는 이전 세대의 경험을 구닥다리라 생각해요. 서로 지혜가 있다면 앞도, 뒤도, 옆도 봐야지요."
―나이 드는 게 서글프진 않나요.
우: "전혀. 나이 먹는 건 특권이라 생각해요. 아직 인생이란 장편 영화의 초반만 본
부부의 별명은 빈센트와 우노를 줄인 '비노(vino)'. 우연일까, 이탈리아어로 'vino'는 와인이다. 1950년대 빈티지를 지닌 두 인생. 60여 년 숙성한 이들 삶의 풍미(風味)는 결코 가볍지도, 지나치게 묵직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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