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1.28 03:13
흰자위 발달한 인간 소통의 기본은 '視線'
공유할 價値 없고 '함께 보기' 사라지니
TV 예능·온라인은 '훔쳐보기'만 넘쳐
"정말 죄송합니다만, 본의 아니게 자꾸 엿듣게 되네요!"
아, 내가 올 한 해 동안 했던 발언 중 가장 훌륭했다.
기차가 여수엑스포역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옆자리 사내의 통화는 천안을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수시로 흥분하여 목소리도 높였다.
기차의 같은 칸에 탄 사람 모두가 2시간 가까이 그의 통화를 함께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표현을 생각해내어 한마디 했다.
당황한 사내는 자리를 옮겼다. 기차 안은 이제 조용해졌다.
그러나 잠시 후 나 스스로가 몹시 우스워졌다.
옆 사내의 통화 엿듣기에 그토록 분노한 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시로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 사회가 관음증이다.
온 사회가 관음증이다.
소셜미디어는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의 주인들에게
어제 저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그 집 아이가 최근 무슨 옷을 사 입었는지
수시로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시시콜콜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다.
노출증이다. 관심이 전혀 없는데도 자꾸 보라고 한다.
결국 훔쳐보고야 만다.
관음증과 노출증은 동전의 양면이다.
TV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예능'이란 이름으로 온통 관음증을 자극하는 것들뿐이다.
TV를 보면 '도대체 내가 이 연예인의 거실을 왜 훔쳐봐야 하는가'하는 생각에 황당해진다.
채널을 돌린다. 이번엔 또 다른 여자 연예인의 침실이다.
흠, 침실은 경우가 좀 다르다. 결국 채널을 멈춘다. 한참을 들여다본다.
이렇게 나는 아주 쉽게 관음증 환자로 전락한다.
몰래 사람의 행동을 훔쳐보는 '몰래 카메라'와 같은 프로그램은 TV가 처음 나올 때부터 있었다.
몰래 사람의 행동을 훔쳐보는 '몰래 카메라'와 같은 프로그램은 TV가 처음 나올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 끝에 숨겨진 카메라를 보여주며 출연자와 함께 웃었다.
오늘날의 리얼리티 예능처럼 이토록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훔쳐보는 것은 아니었다.
1991년 네덜란드의 국영방송인 KRO에서 방영한 '28번지(Nummer 28)'란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쇼(reality show)'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암스테르담 시내, 어떤 거리의 28번지에 7명의 대학생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집 안에서 하는 행동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다음 해인 1992년에 개봉된 영화 '원초적 본능'은 '훔쳐보기'를 노골화한 단 '한 장면'으로
흥행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샤론스톤의 '다리 바꿔 꼬는 장면'이다.
새하얀 옷을 입은 샤론 스톤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정말 숱하게 돌려봤다. 비디오 대여점의 어떤 비디오도 그 장면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죄다 비가 왔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훔쳐보기'의 리얼리티 쇼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다.
한국에서는 요즘 들어 아주 유난스럽다.
그러나 에로틱하거나 폭력적인 서구의 리얼리티 쇼에 비해 한국의 리얼리티 예능은 많이 착하고 교훈적이다. 육아 모습을 보여주며 가족애를 강조하거나 군대 체험을 보여주며 애국심을 강조하기도 한다.
'훔쳐보기'의 기법도 다양하게 진화했다.
출연자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화면으로 보며 이야기하도록 하는 '성찰적 장면'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출연자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겠다는 거다. 기막힌 '훔쳐보기의 교차 편집(cross cutting)'이다.
어머니들을 출연시켜 자식들의 행동을 훔쳐보며 이야기를 나누게도 한다.
시청자 입장에서 이건 '훔쳐보기의 훔쳐보기'다.
'메타적 관음증'이란 이야기다. 푹 빠져든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joint-attention)'다.
인간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
(이제까지 살면서 '눈이 작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눈의 흰자위가 유별나게 컸던 인간은 '함께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차원 높은 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대상의 공유'는 '의미의 공유'까지 발전했다. '문명'이다.
눈의 흰자위가 유별나게 컸던 인간은 '함께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차원 높은 협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대상의 공유'는 '의미의 공유'까지 발전했다. '문명'이다.
그래서 인간은 남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반사적으로 따라 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 장애인 자폐증의 가장 두드러진 증상은 바로 '함께 보기'의 거부다.
'훔쳐보기'는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소통 거부의 집단적 자폐 증상이다.
하나 더. '함께 보기'가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먼저 봐야 한다. 모두가 따라 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용기 있게 먼저 보며 '함께 보기'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리더'다.
하나 더. '함께 보기'가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먼저 봐야 한다. 모두가 따라 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용기 있게 먼저 보며 '함께 보기'를 요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리더'다.
남들보다 먼저 보는 리더의 새로운 시선이 '공유'될 때 사회는 발전하고 구성원들은 성장한다
.
그러나 함께 볼 수 있는 것,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다. 같이 보고 싶지도 않다!
(아, 이건 정말 최악의 경우다.) 그 누구도 스스로 먼저 내다볼 용기가 없다.
그러니 내 시선의 방향을 숨기며 타인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기만 하겠다는 거다.
공유할 수 있는 가치의 부재가 '관음 사회'를 만든다.
'훔쳐보기'는 '함께 보기'가 어려울 때 흥행한다!
'훔쳐보기'는 '함께 보기'가 어려울 때 흥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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