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0.24 03:38 | 수정 2018.10.24 03:40
[141] 노·소론 갈등과 논산 윤증 고택의 비밀
적외선 필터를 통해 사진을 찍으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으로 세상을 기록하니,
시퍼런 여름 경치가 설국(雪國)이 되고 무심하던 사물도 명징해진다.
충청남도 논산에는 조선 후기 소론(少論) 영수 명재 윤증(1629~1714) 고택(故宅)이 있다.
윤증이 한 번도 산 적이 없기에 '옛 고(古)'가 아니라 '인연 고(故)' 자를 쓴다.
공식 명칭은 '명재고택(明齋故宅)'이다. 기품 있고 정갈하다.
그 집을 적외선으로 찍어보았다. 낯선 얼굴이 보인다.
대문이 없다. 솟을대문은 사대부 집 상징인데, 그 대문이 없다.
대문이 없으니 담장도 없다.
휑하게 뚫린 길에서 곧장 마당이 나오고 사랑채가 노출돼 있다.
사진 왼쪽 나무 너머로 맞배지붕을 얹은 커다란 집 한 채가 보인다.
노성향교 대성전이다. 관립학교인 향교가 사대부 집에 맞붙어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고택 오른쪽 언덕을 넘으면 사당이 나온다. 직선거리는 100m 정도다.
사당 이름은 '궐리사(闕里祠)'라 한다. 공자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향교도 궐리사도 모두 200년 집권 여당, 노론(老論)이 관리하고 회합하던 장소다.
노론에 포위당한 소론, 그것도 소론 당수의 집.
무언가 비밀이 있다.
1683년 5월 5일
"(그릇되게) 추록한 공신을 삭제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데, 형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외척의 당파를 물리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지금 (송시열이 지배하는) 세상이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를 두둔하니
이런 풍습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윤증이 박세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조정에) 들어갈 길이 없다."
윤증은 고향 논산으로 돌아갔다.('연려실기술', '강상문답')
1683년 5월 5일 경기도 과천이었다.
1680년 경신년 남인에게 넘어갔던 정권이 서인에게 돌아왔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했다.
3년 뒤 숙종은 정계를 떠나 있던 서인 지도자 3인을 불렀다. 송시열, 박세채, 윤증이다.
박세채에 이어 송시열이 입경했다.
과천에서 대기 중인 윤증에게 박세채가 가서 복귀를 청했다.
그때 윤증이 저렇게 세 번 묻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인을 잔혹하게 숙청한 송시열 무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최종 통고였다.
노론이 주도해서 만든 '숙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세채와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는 모두 송시열을 헐뜯고 해치는 말이었다
(皆疵傷時烈之言).'(1683년 5월 5일 '숙종실록')
이후 숙종이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복귀를 명했지만 윤증은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 없는 정승,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도 불린다.
윤증 묘 앞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징사(徵士) 윤증'.
'징사(徵士)'는 '부름을 받았던 선비'라는 뜻이다.
'회니시비'에서 老論 세상까지
윤증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송시열(宋時烈)도 있었고 어린 윤휴(尹鑴)도 있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주자) 마니아였다.
윤휴는 공맹 사상을 주자와 다르게 해석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이비로 낙인찍었다.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했다. 윤선거도 사이비라 낙인찍혔다.
윤선거가 죽었다. 아들 윤증이 아버지 옛 벗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부탁했다.
송시열은 '쓸 게 없어서 다른 사람 글 베껴 쓰노라'라고 써줬다.
서운한 아들이 수정해 달라 거듭 청했으나 송시열은 거부했다.
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사상 논쟁을 제기하니,
대전 회덕 사람 송시열과 논산 니성(尼城·현 노성) 사람 윤증이 벌인 '회니시비(懷尼是非)'다.
그사이에 '사이비' 윤휴가 주도한 남인 정권이 실각하고 윤휴는 목이 잘려 죽었다. 1680년이다.
2년 뒤 잔존 남인 세력을 서인 내부 강경파가 계략으로 숙청했다.
이를 부도덕하다고 비난했던 송시열이 이들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실망한 서인 소장파가 노론(老論) 송시열파에 등을 돌리니,
이가 소론(少論)이요 이들이 추대한 영수가 윤증이었다.(이상〈땅의 역사 137편과 138편 '송시열'> 참조) 이를 '경신환국'(1680)과 '임술고변'(1682)이라 한다.
그리고 이듬해 숙종이 정국 수습을 위해 송시열과 윤증과 박세채를 부른 것이다.
1689년 송시열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격하되 덧없이 세월이 흘러 문득, 노론 세상이었다.
니산에서 벌어진 일
윤증이 내려온 고향 니산(노성)은 파평 윤씨 땅이 많았다. 그런데 윤증은 초가를 짓고 살았다.
벼슬 없고 덕망 높은 초라한 스승을 위해 제자들이 집을 지었다. 윤증은 이사를 거부했다.
1714년 윤증이 죽었다. 그리고 니산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죽은 송시열 뜻을 따라 그 제자들이 노성에 살던 공자 후손과 손잡고 바로 이 파평 윤씨 권역에
공자 사당 궐리사(闕里祠)를 짓는다는 것이다.
왜 하필 노성인가.
노성에 있는 노성산에는 니구(尼丘)라는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에 궐리촌(闕里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노성산, 니구봉, 궐리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곡부(曲阜)에 있는 지명이다.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이상국이 사온 공자 영정을 그 노성에 모시겠다는 말이었다.
노성은 니산(尼山)~니성(尼城)~노성(魯城)으로 몇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1716년 궐리사가 건립됐다. 노론 정호가 건립기를 썼다.
'지명의 부합이 진실로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그윽이 맞아떨어졌다(地名之符固有不約而冥會者).'
(정호, '장암집', '孔夫子眞像祠宇記·공부자진상사우기')
그런데 건립기에 묘한 구절이 보인다.
'병자정묘년 천지가 번복되는 큰 난리 후,
주화파 잔당이 효종이 명나라를 섬기려는 대의를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송시열 선생의 춘추대의도 우습게 여겼다
(自夫丙丁天地飜覆之後 一種俘虜餘孼 譏斥聖祖尊周之志事 並與吾夫子春秋大義而歸之弁髦).'
궐리사를 건립한 정치적인 취지였다.
바로 춘추대의의 화신 송시열을 우습게 안 소론에 모범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소론 영수 문중 땅에서 말이다.
1805년 노론은 노성산 서쪽에 있던 궐리사를 윤증 고택이 바라보이는 고택 동쪽 언덕 기슭으로 이건해버렸다. 송시열이 열렬히 흠모하던 주자를 궐리사에 함께 배향하고 마당에 '闕里(궐리)'라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한국중앙학연구원 이욱은 '원래는 노성에 살던 공자 후손이 만들었으나
이후 송시열 후학이 개입하면서 노론의 사당이 됐다'고 해석했다.
(이욱, '조선시대 노성 궐리사와 공자 사당', 2007)
이로써 파평 윤씨 소론 영수 영역 한가운데에 노론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마련됐다.
영수 집 안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언덕이었다.
노성향교의 악연
'학교에는 묘(廟)와 당(堂)이 있다.
묘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당에서는 공부를 한다.
묘 앞에 반드시 당을 세워 명륜이라 한다
(學校之制有廟有堂 廟以妥侑堂以修藏 必立前堂名曰明倫)'
(윤선거, '노서유고(魯西遺稿)', '尼山鄕校明倫堂建設時告先聖文·니산향교명륜당건설시고선성문')
윤증 아버지 윤선거 생전에 이미 노성에는 향교가 있었다. 이름이 니산향교다.
지금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그 향교에 명륜당을 세우며 윤선거가 건립문을 썼다.
윤증 13대 종손 윤완식이 말했다.
"궐리사가 집 옆으로 이건하고 몇 년 뒤 노론이 향교를 우리 집 옆으로 이건했다."
차장섭(강원대 교양학부)에 따르면
위 건립문은 윤선거가 빈터였던 지금 고택 자리로 향교를 이건하고 지은 글이다.(차장섭, '명재고택', 2017)
노소론 분당이 없던 시절, 윤씨 문중이 지역 유림과 함께 지었다는 말이다.
향교 이건과 고택 건축 선후(先後)와 무관하게,
정국이 노론으로 넘어가면서 향교는 고택 서쪽을 막는 또 다른 감시 초소가 되어버렸다.
윤완식은 "향교가 옆으로 오고 얼마 뒤 할아버지들이 솟을대문을 없애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감시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떳떳하게 아예 다 까발리고 살자고 했다"는 것이다.
대신 후손들은 사랑채에 신발을 놓는 댓돌을 하나 더 놓았다.
그 댓돌에 신발이 있으면 집안 남자가 집에 있다는 뜻이다.
"감시하려면 해봐라,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한다."(윤완식)
또 옛 마당 오른편 언덕에 작고 좁은 집을 한 채 지어 망루로 삼았다. 지금 고택 수돗가 자리다.
그리하여 여느 명문가와 똑같이 담장과 솟을대문을 가진 고택이
건물만 덜렁 솟은 탁 트인 구조로 100년 넘게 서 있게 되었다.
자연합일(自然合一)의 실현이 아니라 정치 사찰이 잉태한 건축 구조다.
2018년 대한민국
21세기 대한민국은 충청남도 논산 땅에서
200년 넘도록 이 땅을 흔들
어놓았던 노론 독재 시대 흔적을 목격한다.
왕조도 사라지고 식민시대도 갔다. 옛 흔적은 완연하다.
하나 더 있다.
"1980년대 서울 인사동에는 소론 다방이 따로 있었고 노론 다방이 따로 있었다.
서예와 한학(漢學) 선후배끼리 인사동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갈라졌다."(윤여갑 명재사상연구소 이사장)
2018년 대한국인은 함께 다향(茶香)을 즐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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