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89]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colorprom 2017. 8. 31. 14:02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조선일보
                             
             
입력 2017.08.31 03:05 | 수정 2017.08.31 10:48

[89]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

1910년 경술년, 이회영 6형제600억대 재산 팔아 만주로 집단 망명
안동 선비 이상룡 등 집단 망명한 동지들과 신흥무관학교 설립 주도
한국 독립투쟁사의 중심… 전재산 독립자금으로 탕진… 형제… 자식들… 모두 죽어
무장투쟁 노리던 이회영은 조카 등의 밀고로 고문사… 동생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
아내 이은숙 "살아온 모든 게 夢幻"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석영철영, 시동생 시영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
(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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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상해 비행장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임정요원들. 가운데 키 큰 사람이 김구,
오른쪽 중절모를 쓴 노인이 이시영이다. 울고 있다.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이시영김구, 조완구(김구 왼쪽 중절모 쓴 사람)가 입고 있는 양복은
우리 아버지가 마련한 옷”이라고 기억했다. /우당기념관 제공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 ·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우당기념관이 있다.

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관련기사를 더 보시려면,

2조 원이 넘는 재산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던 '이회영'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박민규(s****)모바일에서 작성2017.08.3118:53:28신고
제목에서 사용한 '탕진'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가
이회영 일가의 애국적인 행동에 적합한 단어인가?
김장호(se****)2017.08.3117:56:29신고
훌륭한 조상을 둔, 잘났다고 떠드는 못난 자손들. 서글퍼지는 현실.
안종원(ahnjon****)2017.08.3116:11:57신고
이 들의 자손중에 지난 김대중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가 이회영의 손자이다..
그리고 더불어 민주당 대표를 지낸 이종걸 전대표가 우당의 손자이다..
이들의 애국으로 우리나라가 이렇게 독립도 된것이다..
그들의 애국은 피눈물겨운 것이고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일제와 이승만에게 고초를 당한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김창숙선생님도
이들과 영원히 기억될 애국자들이다.
신욱재(su****)2017.08.3116:06:01신고
명문가 이지만 그 후손중 한명은 김대중과 손잡고 국정원 대북라인 박살낸 이종찬.
또한명은 경박하기로 유명한 이종걸.
천안함 침몰하고 이종걸이 국회에서 한 짓거리 보면 가관이다.
김태영 국방장관한테 일부러 장병들 구조 안한다고 우기는데 피가 거꾸로 솟더라.
저게 도대체 사람인가. 저렇게 국민과 정부를 이간질 시키나. 아마 그 영상 유튜부에 있을듯..
김준영(soni****)2017.08.3114:33:29신고
이런 분들이 계셔서 독립할 수 있었고, 우리가 오늘날 숨쉬고 있습니다. 감사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김대중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고통받고,
김영삼이 망쳐놓은 경제로 청년들은 갈곳을 잃고, 어르신들은 생계가 막막합니다.
진정 애국이 뭔지 배우고 갑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역사 속 숨은 영웅

풍족한 삶 버리고 조국을 택했다, 이회영(李會榮)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후대에 잘 알려진 위인 외에도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공로를 전달하고자 영상실록 '영웅'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입력 : 2017.07.11 00:00

이회영은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여섯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밀사' '신흥무관학교'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당 이회영,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몇 대에 걸쳐 풍족하게 쓸 명동 일대의 토지, 현재 시가 600억 원


이회영의 집안은 선조인 이항복 때부터 시작해 8대에 걸쳐 판서(조선시대 6조의 으뜸 벼슬)를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였다.

또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이 집 소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갑부였다.

가진 재산과 조상 대대로 쌓은 명망으로 그들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월남 이상재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이들이 일제가 준 귀족 작위와 돈에 환호했다.
그러나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그들의 재산을 몽땅 내놓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망명의 삶을 택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였다.
이들은 한 달 동안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집과 논밭을 팔아 40여만 원을 마련했다.
소값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600억 원, 땅값으로 치면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흔히 사회적 지위에 맞게 솔섬수범하는 자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하는데,
이회영의 가문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일생동안 독립운동을 후원하며 전 재산을 바친 그의 삶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가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김규식, 신채호,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가져간 자금이 바닥나 중국의 빈민가를 전전해야 했다.


훗날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

"일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개인의 안위를 접은 희생적 삶이었다.

이회영 여섯 형제 /프리미엄조선 '장대성 칼럼'

여섯 형제, 재산과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
이회영
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 통탄했다.

이들은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

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

/우당이회영기념관
이 중 둘째 이석영은 양부인 한양 최대 갑부 이유원(고종 때 영의정)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한양 성으로 들어올 때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대토지를 소유했다.
그 많은 전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그는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이회영 형제들은 대토지를 빨리 헐값에 모두 매각하여 현금으로 만들었다. 
전 가족 40여 명과 기타 일꾼 등 총 60여 명이 1910년도 12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들은 1911년 1월 영하 30-40 도의 극심한 추위에 마차 10대에 나눠타고 압록강을 건너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향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회영의 형제와 가족들은 굶어 죽거나 병사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다섯째 이시영이었다.
그는 해방 후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만물상] 이회영·시영 형제
 

독립투쟁의 심장, 김좌진·홍범도 장군을 길러낸 곳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2년 뒤에는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회영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마흔이 되던 해, 가족들과 만주로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만주에 도착한 그는 함께 온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오늘부터 당신들은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라며 그들을 독립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망명지에서 이회영이동녕, 이상룡 등과 함께 이주동포들의 정착과 농업 지도를 돕기 위해

'경학사'라는 자치기구를 만들었다. 부설기관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도 설립했다.

'신흥'이란 신민회의 '신(新)'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興)'자에서 따온 말이었다.

1912년 이회영,이동녕,이상룡 등이 많은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군 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곳으로 만주 삼원보 지역의 농촌 /독립기념관 제공(왼쪽),
신흥무관학교과 생도들의 모습 /프리미엄조선 '장대성 칼럼'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라 불렀으나
실제로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곳이었고 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청년들에게 군대 전술과 총기 사용,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다.
1920년 폐교하기까지 10년간 약 3,000여 명의 항일 전사를 길러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이청천, 이범석 장군도 생도 혹은 교관으로 이곳을 거쳐갔다.
이들은 1920년 일어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투쟁,
1940년 중경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 활동 등 맹활약을 펼쳤다.

백방으로 뛰며, 황제의 해외망명을 계획했지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회영
고종에게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회의특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이상설특사로 추천했고
'헤이그 특사 3인'(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이
구성됐다. 그들은 가까스로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일제의 방해와 각국의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1918년, 이회영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과 은밀히 고종의 해외망명을 계획했다.
고종중국으로 탈출시켜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하자는 구상이었으나 결국 실패했다.
망명 직전 고종이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장례일인 1919년 3월 3일 이틀 전인 3월 1일 정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의 물결은 전국 곳곳으로 퍼졌고 해외로도 이어졌다.
3·1 운동이 일어난 다음 달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설립됐다.


권력보다 조국의 독립이 절실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이회영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아나키즘(Anarchism)을 채택한다. 임시정부라는 형태에 회의적이었던 그는 임시정부보다 '자유연합적 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정부 자체가 특정세력을 중심으로 한 권력이기 십상이니

이러한 형식을 탈피해야만 다양한 정파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견과 달리 임시정부는 수립되었고,

그때부터 이회영신채호와 함께 베이징에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의 권력 암투에 실망을 느낀 그는

아나키스트(Anarchist, 무정부주의자) 위주의 독립운동 조직을

한·중·일 항일 공동전선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1924년에 의열단을 후원해 조선총독부와 일제 요인들의 처단을 시도했고,

1929년에는 김좌진 등과 손잡고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전선을 넓혀가는 데 애썼다.

비밀결사조직인 '다물단'을 조직해 일본 밀정을 숙청했고,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으로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억압하지 않고, 억압당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다

이회영은 일제 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 억압적인 권력 앞에 단호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와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권력 다툼을 하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혁명작가 루쉰과 러시아의 맹인 무정부주의자 예로센코, 신채호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해 활약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대안으로 아나키즘에 주목했다.
아나키즘은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어 혼란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은 강제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협동이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활동을 중심으로 삼는다.

이회영와 교우했던 독립운동가들 상당수가 아나키스트였지만,
그 시절 좌도 우도 아닌 그들은 자유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 양편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했다.

(참고=역사채널e '역사e: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우당 이회영, 더 몰랐던 이야기

이회영 부인 이은숙, 공장생활과 옷 수선으로 독립운동 자금 마련

1925년 경 중국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이 나고, 모을 방법이 없어지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국내로 잠입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어렵게 마련해야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다 발각되면 일본 경찰에 의해 목숨이 달아날 정도로 고문을 받아야했으므로 자금 모금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은숙은 공장에서 일하고, 때로는 유곽 기생들의 옷을 수선해주며 돈을 벌어 중국으로 자금을 보냈다. 자신은 한산 이씨 양반 사대부의 딸로 태어났고 남편은 조선 최고 귀족이며 갑부였지만,
남편이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전 재산과 모든 것을 바쳤고
부인은 온갖 고생을 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독립운동 생활을 <서간도 시종기>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일본 정부, 이회영 두려워 재판하지 않고 고문으로 죽이라고 명령

1932년 11월, 66세의 이회영은 만주군벌 장학량과 연대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선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려고 대련항을 거쳐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련을 가는 여객선 안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그는 값싼 4등 선실에서 수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일본 경찰은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이회영을 지목하고 체포했는데
이는 누군가의 밀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회영의 단원들은 밀고한 이규서연충렬을 찾아내었고 백정기가 처단하였다.
이규서이회영의 조카였고
연충렬은 임시정부 요인 연병호의 둘째 아들이며, 또 다른 임시정부 요인인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단, 이규서와 연충렬은 이회영을 신고한 이외에 일제에 협력한 다른 증거는 없었다.)
이회영 선생,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중국 뤼순(旅順) 형무소
/프리미엄조선 '장대성 칼럼'
뤼순(旅順) 형무소 전경. 사진 아래엔 당시 일본군이 이 감옥을 부르던 명칭인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가 적혀 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체포된 이회영은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노인의 몸으로 고문을 받던 중 뤼순(旅順) 형무소로 옮겨져
그 곳에서 더 모질고 혹독한 고문으로 운명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 중에도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않고 모든 것은 재판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서방기자들이 참석한 이회영의 재판정에서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박을 받을 것을 염려해,
강제 불법으로 자행한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발표과정이 상세히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안중근 의사도 재판과정을 거쳤으나
일본 정부는 한일합병의 전 과정을 잘 아는 이회영은 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죽이라는 비밀 특명을 내렸고,
일본경찰은 그 명령을 수행했다.
그리고 "여객선에서 체포되어 취조 중 유치장 창살에 목을 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라고 거짓 보도를 하였다.

(참고=프리미엄조선 '장대성 칼럼')

우당 이회영, 전 생(生)을 바친 독립운동


우당 이회영, 후대의 이야기

우당기념관

/출처= doopedia.co.kr
1985년 10월 우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990년 9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92-10번지에
우당기념관을 준공하였고, 2001년 6월 15일 지금의 위치에 기념관을 신축, 이전하여 개관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취를 기념하는 전시관은 모두 6개 코너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물은 이회영의 흉상과 사진, 연보를 비롯하여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망명 직전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신채호·조완구·김좌진·이동녕 등 애국지사 34명의 초상화,
망명 전에 소장하였던 장서들, 이회영이 그린 묵란(), 경학사 설립 취지문,
이상설·이준·이위종이 가지고 간 고종의 신임장, 백범 김구가 쓴 민족정기 휘호,
이회영이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혁명열사 증명서, 이회영이 직접 조각한 낙관과 도장,
대한독립단의 모금 영수증, 아나키스트 운동 관련 자료, 독립운동 활동 사진 등이다.

의복과 모자, 신발 등의 유품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10길 17 유니온빌
- 문의 : 02-734-8851 / www.woodang.or.kr


우당이회영 흉상, 집터

표석 문구
독립운동가 이영(1867~1932)과 이시영(1869~1953)은 1910년 건영ㆍ석영ㆍ철영ㆍ호영
나머지 4형제와 함께 서간도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 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였고,
이시영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재임한 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화콘텐츠진흥원)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1길 20 (명동1가)
- 문의 : 02-2125-0848 (서울지방보훈청 선양교육팀)


'이회영과 젊은 그들'
항일 겹사돈 3代… 양가 합쳐 독립유공자만 13명
우당 이회영과 일농 윤복영 '난(蘭)부채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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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대(g30****)모바일에서 작성2016.09.1700:53:49신고
우리가 고도 성장의 이면에는 이런 선조들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
안타가운 것은 선비 정신이 사라져 버린것이
우리 국민들은 역사에 대하여 끊임 없이 성촬하고 반성하여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이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김명현(good****)2016.09.1422:29:07신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겪으신 고초, 희생, 헌신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낙규(ste****)2016.09.1408:36:07신고
참으로 위대하시고 존경할 수밖에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러 번 들어 왔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더욱 더 머리가 숙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