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나라

[107] 江에게 물어본다, 모진 세월 그들은 어찌 살았냐고

colorprom 2018. 1. 17. 16:16

[박종인의 땅의 歷史] 에게 물어본다, 모진 세월 그들은 어찌 살았냐고


조선일보
                             
             
입력 2018.01.17 03:03

[107] 곡성 청류동의 비밀과 조병순, 정순태 그리고 장지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발을 딛지 못한 항일의 땅'三城三平'의 곡성
섬진강변 모래밭 사라지고 지금은 눈부신 생명의
청류동 계곡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옛 글귀
위정척사파 선비들의 '비밀의 회합처'
곡성 선비 조병순, 정순태전 재산 털어 비밀독립운동
조병순은 체포 후 순국
조병순 후손,"누구든 했을 작은 선행"
'친일파 낙인' 장지연이 그 불망비 쓴 기록 있어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박종인의 땅의 歷史
일제강점기 호남 땅을 꿰찬 일본인들은 여섯 군데 마을을 삼성삼평(三城三平)이라 불렀다. 곡성·장성·보성과 함평·남평·창평이다. 한마디로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뻘 속 삼십 리를 기어가는" 독한 동네라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말도 했다. 기세등등한 일본 자본이 상권을 차지하러 들어왔다가 토착 자본에 뼈도 못 추리고 퇴각한 기억 탓이다. 1914년 총독부는 창평군은 담양군에, 남평군은 나주군에 편입시키고 함평군은 많은 읍과 면을 인근 장성과 광주와 나주에 잘라줘 버렸다. 사람들은 그 쓰린 패배의 후유증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이 고을들은 고집스럽고 배일(排日)스럽다. 그 삼성 마을 곡성(谷城)에 강이 흐른다. 곡성 곳곳에 숨은 골짜기에서 물이 내려 강이 된다. 청류동(淸流洞) 계곡도 하고많은 곡성 골짜기 중 하나다.

백사장 반짝이던 섬진강

전남 장흥 웅치에서 보성을 거쳐 곡성으로 흐르는 강 이름은 보성강이다. 섬진강과 만나 광양만에서 바다가 된다. 보성강을 곡성에서는 대황강(大荒江), 대황천이라 부른다. 크게 거친 강이라는 말이다. 왜 거칠고 왜 황량한가. 지금은 강 주변에 수목이 울창하지만, 20년 전까지 대황천 변은 백사장이었다. 그 고운 모래를 중장비로 강바닥까지 싹싹 훑어 제방을 지었다. 남는 모래는 정수기 여과 필터용 모래로 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수출했다. 황량한 모래밭은 사라졌다. 그런데 문득 모래 사라진 공간에 풀씨가 날아오고 버드나무가 솟더니 습지가 가득 들어선 게 아닌가. 하여, 대황(大荒)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침실습지는 물새 반, 물고기 반, 물안개와 짐승들을 촬영하려는 인간 무리들이 가득하다. 세상이 대개 그렇다. 완벽한 소멸, 완벽한 좌절, 완벽한 완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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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곡성 땅에 섬진강이 흐른다. 흰 눈이 가득 쌓인 강변 침실습지가 찬란하다. 골짜기에서 강으로 흐르는 물처럼, 곡성에는 거침없고 방향 똑바른 삶이 있었다. /박종인 기자
청류동 계곡과 조병순, 정순태

신라 사찰 도림사(道林寺)가 있는 동악산은 계곡이 아름답다. 도림사를 끼고 있는 청류동(淸流洞) 계곡은 특히 그러하다. 넓은 반석 위로 얇게 퍼지듯 물이 흐른다. 그 풍경도 아름답거니와, 암반과 바위 곳곳에 새겨진 글자들도 아름답다. 산수(山水)는 산수이되 그 각자(刻字) 또한 아름다워 청류동 풍경은 문화산수(文化山水)라 불린다. 그런데 글자들이 심상치 않다.

'保家孝友(보가효우)'. '집안을 다스리는 데 효와 우애로 하라.' 도림사 주차장 옆 바위에 시큰둥하게 새겨져 있다. 그 아래 계곡 이름 '淸流洞'이 보인다. 향토사학자 박혜범에 따르면, 이 글씨를 쓴 이는 고종이다. 옆에 작은 글자 몇이 새겨져 있다. '珠淵書于昔御堂(주연서우석어당)'. 주연은 고종의 호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던 고종 침전이다.

온갖 바위와 반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두서없이 적어보면 이렇다. '丹心臺(단심대)' '西山講論(서산강론: 서산 선생이 강론을 한 곳)' '黃梅泉進士杖屨處(황매천진사장구처: 매천 황현 진사 다녀간 곳)' '田艮齋宋淵齋鄭小松三先生杖屨處(전간재 송연재 정소송 삼선생 장구처: 전우·송병선·정소송 세 선생 다녀간 곳) '奇蘆沙松沙兩先生杖屨處(기노사송사양선생장구처: 기정진·기우만 두 선생 다녀간 곳). 전우·송병선·정소송은 유학자요 의병장이다. 기정진과 기우만 또한 구한말 의병장이었다. 황매천 진사는 매천 황현이다. 경술국치를 맞아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선비다. 단심대는 말 그대로 일편단심을 다지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청류동계곡에 새겨진 숱한 글 가운데 하나, '보가효우'와 '청류동'.
청류동계곡에 새겨진 숱한 글 가운데 하나, '보가효우'와 '청류동'.
짐작이 가지 않는가. 청류동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고단한 세상을 고민했던 위정척사파의 회합 장소였다. 개혁 대신 쇄국을 앞세운 한계는 있었으나, 망국의 설움을 의병이라는 무력 투쟁과 비밀결사로 털어내려는 지사들의 모임처였다. 그 많은 글귀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春沂(춘기) 荷亭(하정).

춘기는 정순태(丁舜泰), 하정은 조병순(曺秉順)이라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곡성에 살던 유학자들이다. 정순태 집안은 만석꾼이고 조병순 가문은 천석꾼이었다. 향토사학자 박혜범이 말했다. "옛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재산을 팔아 독립 자금을 대던 지사였으며, 곡성 땅을 노리는 일본 자본에 앞서 토지를 대량으로 매입한 뒤 주민들에게 장기 할부로 되팔아 지킨 자본가였다." 조병순의 증손자 조동현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이, 어른들이 화전(花煎) 놀이하는 마냥 청류동 가서 모이셨다고 하셔요." '서산 강론'의 서산은 조동순의 6대조 조형일이다. "근데 할아버지께서 골짝 골짝마다 인삼을 심으시고 삼베 뭐 이런 것들을 잘했다네요. 그래가지고 자금을 계속 모으신 모양이에요." 문중 서책이 전쟁 때 불타 기록은 없다. 오직 향토사학자의 채록과 후손의 문중 증언뿐이다.

춘기 정순태 집안은 어떠했나. 조병순과 같은 이치로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우고 '자금'을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문중에서 7대를 모아온 장서 1만권을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했다. 양반가의 정신적 목숨을 그리 내놓았다.

그러던 1921년 조병순이 죽었다. 후손 조동현이 말했다. "당시 돈 1만원을 들고 나주에 가셨대요. 백구두를 신고, 집사 두 분을 데리고. 다녀오신 다음에 그 한 일주일 정도? 오시자마자 체포되어 가지고 옥고를 치르시고 있다가 나오셔 가지고 바로 하루 만에 백중날에 돌아가셨대요. 논이 한 마지기에 2원 정도 했대요. 그 돈의 행적 때문에 아마 옥고를 치르시지 않았나. 피 묻은 적삼을 상할머님이 1962년? 63년? 그때까지 살아계셨는데 그 피 묻은 적삼을 보존하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범상치 않은 최후 행적과 청류동에 걸린 글자들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조동현이 사는 곡성 집에는 조병순의 사랑채 '이이재(怡怡齋)'가 있다. 경술국치 때 총독부가 주는 조선 귀족 작위를 거부한 구한말 문신 해관(海觀)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대청마루 위에는 청류동 입구에 새겨진 고종의 글씨 '보가효우' 현판이 걸려 있다. 죽음도, 인연도, 죽음 이후 100년 세월도, 의미심장하다.

조병순 영사비와 위암 장지연

지사 조병순 불망비에 관한 기록, 조선환여승람.
지사 조병순 불망비에 관한 기록, 조선환여승람. 위암 장지연이 비석을 썼다고 적혀 있다.
그렇게 조병순이 죽었다. 1921년 음력 7월 15일 백중날, 양력 8월 18일이다. 삼년상을 치르고, 그가 살던 곡성 땅 능파리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섰다. 영사비(永思碑)라고 한다. 비석 머리에는 태극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荷亭曺公秉順永思碑(하정조공병순영사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歲旃蒙赤奮若夏四月立(세전몽적분약하사월립).' 갑자을축병인 하는 간지의 옛 표현, 고간지다. 1925년 을축년 여름 사월에 비석을 세웠다는 뜻이다.

1937년 충남 공주의 유학자 이병연(李秉延·1894∼1977)이 펴낸 인문지리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이 비석은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썼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그 장지연이다. 장지연은 1921년 10월 2일에 죽었다. 조병순이 죽고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장지연. 망국을 곡(哭)했던 그는 짧은 망명 생활 후 총독부 기관지 격인 매일신보에 친일의 극을 달리는 글을 써댔다. 대한민국 시대, 그에게 추서됐던 건국훈장 국민장은 취소되고 그는 지금 친일파로 분류됐다. 글이 너무도 명징하게 친일적이었다.

그런 그가 비밀스러운 운동가 조병순의 영사비를 썼다. 조병순과 학문적 동지였던 오강 김정호의 유고집도 그가 서문을 쓰고 발행을 했다. 1916년 호남 의병장 기우만이 죽고, 후학들이 그의 문집 정리를 부탁한 이도 장지연이다. 모두 그가 친일적인 글을 공포하고 다니던 친일의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삼성(三城)의 땅 곡성에서, 지사(志士) 조병순 후손은 어찌 된 인연으로 언필칭 친일파 장지연으로부터 추모 글을 받았을까.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양명학자 김택영은 장지연을 이렇게 평했다. '지연은 여자처럼 섬약하였다. 말이 감히 입에서 튀어나오려 하지 않았다(志淵纖弱如女子言若不能出口). 그가 내 손을 잡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데, 뜻한 바가 있었다. 문득 슬퍼서 여기 적는다(握余手述其平生意若有所屬也輒慨然而書此).'(1922년, 합간소호당집보유 권2, 장지연 사략) 완벽한 소멸은 없다. 완벽한 좌절은 없다. 완벽한 완벽은 없다.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다. 그러나 혹시 세상이 보지 못한 얼굴은 없는가. 100년 전 곡성에 찍힌 발자국은 의혹투성이다.

어떤 조그마한 선행

눈발 가득한 곡성 땅에서 나는 그렇게 백 년 전 군상(群像)을 보았다. 골짜기를 떠날 무렵 내가 조병순의 증손자 조동현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훈장 받게 해 달라고 나라에 신청하지 않았습니까?"

예순둘 먹은 증손자가 이리 답했다.

"당연히 그 당시에 독립운동 안 한 사람 있겠어요? 나라 찾기 위해서 누구든지, 말하자면, 나라를 찾는다는 가치는 지금이라도 마찬가지죠. 상황이 그런 상황이라면 저나 박 선생님도 마찬가지일 거고, 아무리 촌부(村夫)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든지. 어쩌다 자기 개인 영달을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그냥 그분들이 그 시대를 사시면서 당연히 그러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조그마한 선행이다, 그런 것들 뭐, 그렇잖아요."

어떤 조그마한 선행을 하다가 지서에 끌려갔다가 적삼에 피 칠갑이 된 채 업혀 와 다음 날 세상을 하직하는, 그런 세상에 그런 당연한 촌부들이 곡성에 살았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17/20180117000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