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한국전쟁]

北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생존 국군포로)' 500명…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일병 유영복 (조선일보)

colorprom 2018. 8. 27. 15:32


[Why]

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생존 국군포로)' 500아무도 찾지 않는다


조선일보
                             
             
입력 2018.08.25 03:00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2000년 스스로 탈북·귀환한 '일병 유영복'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46년 만에 주인 찾은 화랑무공훈장
유영복씨가 훈장이 새겨진 국가유공자 모자를 들어 보이고 있다.
국군은 1953년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실종된 그를 전사자 처리했고,
이듬해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북한에 포로로 억류됐던 유씨는 탈북 후인 200010월 육군 제5사단에서 전역식을 가졌다.
훈장도 46년 만에 주인을 찾았다.
유씨는 북에서 함께 고생한 국군 포로 동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 박상훈 기자

"우리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1일(현지 시각) 미국 하와이주(州) 펄하버-히컴 합동기지에서 미군의 유해봉환식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전사해 6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유해 55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최고 예우를 갖춰 맞이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북 정상이 미군 유해 송환에 합의한 지 두 달 만이다.

펜스 부통령은 이날

"모두가 6·25잊힌 전쟁이라고 했지만, 오늘 우리는 이 영웅들이 절대 잊히지 않았음을 증명했다"고 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북으로 끌려갔고, 돌아오지 못해 그곳에 잠든 아들들이 우리에게도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82000명의 한국군한국전쟁 이후 실종됐고,

5~7만명이 북한과 그 동맹 국가(중국)에 억류됐다"고 추정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탄광 등에 배치돼 평생 고된 노동을 했고, 고향을 그리다 눈을 감았다.


지난 20일 금강산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에서도

남쪽의 이달영(82)씨는 국군 포로로 북에 간 아버지가 이미 숨진 바람에 그 이복동생들과 만나

그리움을 달랬다.

2014년 기준 북한에 생존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 포로 숫자는 500여 명 정도.

그마저도 북한은 6·25전쟁 포로에 대한 상호 교환이 이루어진 1954년 이후

"강제 억류 중인 국군 포로는 공화국에 한 명도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 포로들 중 일부는 목숨을 걸고 탈북을 했다.

1994년 고(故) 조창호(1932~ 2006) 중위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81이 고향 땅을 밟았다.

이들 중 현재 29명이 생존해 있다.

평균 연령이 90 안팎으로, 절반 가까이가 병상 신세다.


유영복(88)씨도 우리가 잊고 있던 '라이언 일병' 중 한 사람이다.

47년을 북한에서 살다 2000년 한국에 들어온 그는

'덤'으로 주어진 남한 생활의 상당 부분을 국군 포로 송환 운동에 바쳤다.


그랬던 그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0일 경기도 이천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이제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했다.

"아무도 국군 포로를 찾지 않았다"

육군 제5사단 27연대 소속 소총수(일병)였던 유씨는

1953년 6월 10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불과 50여일 전이었다.


북한이 포로들을 상대로 공민증을 발급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부터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경남도 단천의 검덕광산에서 일했다.


2000년 탈북해서는 10년 넘게 국군 포로 송환 운동 현장을 누볐다.

'귀환국군용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회장을 지냈고, 2011년엔 자신의 증언록 '운명의 두 날'도 펴냈다.

2015년에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김정은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 국군 포로 송환 활동을 했다.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왔다. 귀환한 국군 포로들을 위한 단체나 자리는 없더라.

2014년 이들을 모아 귀환국군용사회를 결성했다.

북한이 우리를 탄압한 사실, 국군 포로가 얼마나 많았으며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아왔는지 알리고 싶었다.


포로가 된 것이 자랑은 아니다. 부끄러운 일인 것 안다.

하지만 유혈(流血)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

'대한민국 국군 중에서는 자기 본분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또, 국군 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북한을 향해 '여기 80명이나 있다'고

전 세계에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엔 가명을 써가며 활동했다."

―목표로 하는 바는 이루었나.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귀환 용사들을 모아 국가와 사회에 이런저런 호소를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 등 고관대작 중에선 우리를 만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제는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관심사는 비핵화와 종전 선언이지 않냐. 국군 포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회담에서 우리 얘기를 꺼내지도 않을 것이고, 북한이 받아주지도 않을 것 같다.

당국자들도 남북 회담에 이 문제를 꼭 올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도층 인사들 중 한 명이라도 이 문제를 제기하면 내가 '얼굴마담'이라도 하며 보조를 맞추겠는데,

민주당이든 한국당이든 말 한마디 하는 국회의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무슨 힘이 있다고 나서겠는가."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유영복씨가 20156월 김태훈(왼쪽) 변호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김정은 제소 계획을 밝히는 모습. 그는 탈북 후 10여 년을 국군 포로 송환 운동에 매달렸다.
/ 성형주 기자

―국군 포로들을 찾는 곳은 없었나 .

"몇 년 전 오산 미군 공군기지에서 내 체험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 집을 다녀간 워싱턴포스트(WP) 기자가 시민단체를 통해 나를 주한 미군에 소개해준 것이다.

기력이 달리는 노인이지만, 우리 군부대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기꺼이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한국에 오고 나서 처음 몇 차례 강연을 했지만, 이후엔 내가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

내가 나서면 자연스레 '국가는 무엇을 했느냐'는 얘기로 이어지니 불편한 것이다."

―미군의 유해 송환을 본 소감은.

"살아있는 국군 포로들도 못 데리고 오는데 우리가 유해 송환을 생각할 처지가 되나.

2002년에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평양으로 날아가 일본인 납북자 가족 5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2번이나 북한에 가서 김정일의 사과를 받고, 자국민을 데려오는 그 모습이 정말 부러웠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포로는 전시(戰時)에 상대국의 권력에 들어간 적군이다.

자유를 박탈당하고, 때로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6만여 명의 국군 포로들도 그랬다.

북한은 내무성 산하에 건설대를 세워 이들을 집중 수용했다.

가슴팍에 '괴뢰군 포로' 딱지를 단 이들은 불발탄 처리와 탄광 내 발파(發破)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강요당했다고 귀환 용사들은 증언한다.


유씨는 "휴전 후 폐허를 복구할 노동력이 부족했던 북한은 국군 포로들을 복구 사업 곳곳에 강제 동원했다.

검덕광산에만 1000여 명이 있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나.

"납과 아연을 생산하는 함경도 검덕광산에서 30년 넘게 측량사로 일했다.

지하 1㎞ 밑으로 내려가 10㎞에 달하는 갱도를 따라가야 작업장이 나온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피부가 아렸고,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번 사고가 발생하면 스무 명이 넘는 광부가 죽었다.

일과표는 하루 8시간 일을 하라고 했지만,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절대 쉴 수가 없으니

광산에서 먹고 자는 날도 많았다.

하루 종일 유독가스를 마시며 일했으니, 지금도 만성 폐·기관지 질환을 앓고 있다."

―북에서 국군 포로는 어떤 대우를 받나.

"'성분'을 중시하는 북한 사회에서 국군 포로는 최하위 계층이다.

포로라는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고가 발생하면 책임도 져야 한다.

북한은 당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사회인데 가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대다수는 젊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늙어서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았다.

차별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포로의 자식들은 군대나 대학에 가지 못했다.

2세들이 물었다. '대체 우리는 왜 태어난 거예요?'"

―'고난의 행군'도 직접 겪었는데.

"저축과 연금이라는 개념이 없는 북한이다.

정년 후에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농사밖에 할 일이 없었다.

배급을 준다고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그마저도 90년대 들어서는 끊겼다.

산에 옥수수를 심었다. 비료도 없고, 노인이니 힘도 달리더라. 또 서로가 어려운 때라 도둑들도 많았다.

그때 몇 번이나 굶어 죽을 뻔했다.

농촌으로 시집간 동생들에게 강냉이죽이라도 얻어먹었으니 겨우 살았지.

동네 사람들이 '저 노인도 며칠 못 가서 죽을 거다'고 했는데…."

좌절의 연속이었던 국군 포로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등 남북 관계의 변곡점마다

국군 포로들은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고향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번번이 헛된 기대라는 걸 알게 됐지만."

―포로로 처음 끌려갔을 땐 곧 송환될 줄 알았다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국제 정세도 남북 관계도 변해 통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통령, 우리를 지휘했던 중대장이 살아있는데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찾으러 올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기억하나.

"이제 고향에 간다며 새 옷을 한 벌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에서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두고 '제일 나쁜 놈'이라고 욕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평양까지 와서 성명을 발표했으니 고향 갈 날이 다 됐다고 생각한 거다.

북한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과 국군 포로 등을 교육해 '통일 대비 인력'을 양성한다는 얘기도 나왔을 때니까."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는 어땠나.

"6월 13일 정상회담이 있던 날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찾아가 사정해서 겨우 볼 수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김대중김정일이 악수하고 포옹하는 모습을 보니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40년 동안 부려 먹을 대로 다 부려 먹었으니,

이제 국군 포로들도 여생(餘生)은 고향에서 보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틀 뒤 발표된 6·15 공동선언에는 관련 내용이 없었다. 매우 허전하고 또 서운했다.

한평생 허망한 꿈과 희망을 우리가 가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 전 대통령이 평양을 다녀간 지 43일 후. 그는 한 보따리상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했다. 그의 나이 70이었다. 동행한 이들은 "노인은 탈북하다 실패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죽음에 미련은 없었나 보다.

"70을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다만 살아서 서울로 돌아가 명예를 되찾고 싶었다.

우리들은 변절자나 배신자가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했고, 북한 체제를 증오했다는 것을 대변하고 싶었다.

같이 고생하다 먼저 죽은 동료들의 심정을 살아온 사람이 말해주고 싶었다."

―부친과 50년 만에 재회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이미 전사자가 되어 있더라. 전투 중 실종됐으니 그대로 죽은 줄 안 것이다.

남한에 홀로 남아 아흔을 넘긴 아버지(당시 94세) 앞에서 전역 명령을 받았다.

치매였는데, 평상시에는 못 알아보다가도 정신이 돌아오면 나를 부둥켜안고 우셨다.

내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돌아가셨는데, 그 전까지 동대문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같이 보냈다.

뒤늦게 '아들 노릇' 한 거다.

어머니(1959년 작고)는 전쟁통에 어린 네 동생을 데리고 황해도 연백의 친정으로 피란을 가 있었다.

38선 바로 이남에 있던 이곳이 휴전과 함께 북한 땅에 편입됐다.

열심히 일하면 통행증을 발급받아 종종 얼굴을 뵐 수 있었다."

―이번 판문점 선언은 어떻게 보았나.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시도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두 나라가 정말 통일을 할 수 있을까.

북한에 50여 년 가까이 있으면서 경제는 몰라도,

과연 저 지독한 사람들이 정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국군 포로들을 기억해야 할까.

"나 개인적으로는 여한이 없다.

국가의 혜택도 받았고, 북에 있던 아들 가족네도 데리고 왔다. 딸은 남아 있지만, 자기 가족이 있고….

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같이 고생하고 울고 웃었던 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그들도 이 땅을 밟아서, 발전된 한국의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국민들이 국군 포로나 한국전쟁 중 발생한 전사자들에 대해 관심이 너무 없다.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현충원이나 전쟁기념관에 기념비라도 하나 놓아줄 수는 없는 건가. 주구장창 요구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제는 늦은 것 같다. 북쪽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 온 귀환 용사 중에서도 3분의 2가 죽었다.

늦은 것 같고, 이제 나도 지쳤다. 여기서 더 바라는 건 허욕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좌우(左右)를 가리지 않고 역대 많은 대통령들이 공약이나 국정 과제 등을 통해

국군 포로와 납북자의 송환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구체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언(甘言)은 무용지물이 됐다.


국가의 우선순위 리스트에서 국군 포로는 어디쯤에 있을까.

1000명이 넘는 평화유지군을 해외 곳곳에 파병하는 시대.

내일 아군 병사가 적군에 잡힌다면 우리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미 국방부 산하 전쟁 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의 모토는 이렇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Until They are Home).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4/2018082401570.html



유기언(baw****)2018.08.2612:24:07신고
위안부의 지나간 고통에 대해선 수년째 날선 공방과 결론없는 싸움을 선동하면서,
살아서 지금도 고난을 겪고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나라.
수학여행간 학생들의 원혼엔 온 정권이 명운을 걸고 달려들면서
적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해군장병들의 적은 적이 아니라고 외치는 나라.
과거의 발전은 독재에 의한 것이라 짓밟고 현재의 고통은 미래를 위한 바탕이라고 외치는 나라.
우린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고 선동당하고 있다.
정부가 국군 포로 송환문제에 신경 안쓰는거 까는건 좋은데, 왜 애꿎은 위안부 문제를 여기 끌고 오나? 위안부 문제도 '지나간 고통'이 아니고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고통'이다.
A, B 모두 중요한 문제인데 A는 관심을 못받고 B는 관심을 받고 있는거지,
B는 관심받을 가치가 없는건 아니다.

배용립(sep****)2018.08.2611:51:58신고
대한민국은 충성하면 개취급, 배반하면 투사니 하면서 충신 취급을 해왔다.
이런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정권을 되 찾아오는 날 강력한 의지로 바로 잡아야 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하신 분들은 지구 끝 까지 가서라도 그 유골이라도 모셔와야 한다.
여칠회(chi****)모바일에서 작성2018.08.2611:36:01신고
북한과 문재인정권은 더이상 이산가족의 아픔을 평화쇼에 이용하지말고
휴전선에 이산가족 만남의 집을 지어 모든 이산가족의 상시 만남을 전면 허용해야 합니다.
또 문재인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와 납북인사 및 국군포로의 송환문제를 포함한 북한동포의 인권문제를 현재 추진 중인 미북 및 남북협상의 최우선 의제에 포함해야 합니다.
정부는 이와함께 사문화되고 있는 북한인권법을 즉각 시행해야 합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4/20180824015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