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이영훈 교수][반일종족주의] (이선민 기자, 조선일보)

colorprom 2019. 10. 14. 18:57


[논쟁][1]‘국사학도’ 기자가 이영훈 교수에게 묻다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 글을 씁니다.
지난 7월 초 주익종 박사님에게서 이 교수님을 비롯한 이승만학당의 연구자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는 반갑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습니다.
저도 문재인 정부가 몰아치는 관제(官製) 민족주의의 종족주의적 성격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걱정해온 터였기에 누구보다도 이 주제에 정통하신 이 교수님께서 한국 사회와 국가를 쇠퇴의 길로
밀어넣고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몰아내는 데 깃발을 들고 나오신 데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종족주의를 부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나머지
우리 사회와 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하시지는 않을까 우려도 됐습니다.
평소 이 교수님이 쓰신 책과 글을 즐겨 읽고 인터뷰 등을 통해 대화도 여러 차례 나누어서
이 교수님의 지론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일 종족주의’를 받아서 읽으며 ‘역시~’라는 감탄이 나왔습니다.
사실 확인과 논리 전개가 거친 일부 필자의 글 두어 편이 거슬렸지만
책의 핵심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기에 그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른 필자들의 글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나 교양서가 가르쳐온 상식이나 통념과 어긋나는 서술들에 당황한 독자도 많았겠지만
저는 꾸준히 관련되는 글을 읽고 기사로도 소개해온 터라서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그동안 펴내신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책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몇몇 글의 어떤 부분에서는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런 주장은 지나친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 전체를 관류하는 사실의 힘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종족적 민족주의’를 선동해온 좌파 인사들과 일부 언론이 이 책에 대한 공격에 나서
필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상황에서 같은 편 내에서의 이견(異見) 제시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7월 말 조선일보에 실린 ‘종족적 민족주의를 넘어 시민적 민족주의로’라는 칼럼을 통해
이 책에 대한 제 생각의 일단을 짧게 밝히는 데 그쳤습니다.
   
   
   서술되지 않은 내용 때문에 불편했던 독도 관련 글
   
   그러나 그 뒤로 ‘반일 종족주의’를 읽은 우파 인사들이 여러 명 잇달아 당혹감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그들의 ‘두통(頭痛)’이 어디서 비롯됐으며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누군가 지식인이 나서서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파 내의 지적 혼란은 계속되고 계속해서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특정 주제를 다룬 학술서가 아니고
광범위한 문제들을 여러 필자가 나눠서 집필한 대중서이기에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보다는 관련 주제들을 두루 다뤄온 언론인이
그 책무를 지기에 적합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지난 수십 년 동안 학술 담당 기자로서 이 책에서 다룬 대부분의 주제를 접했고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저도 그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이 교수님을 비롯해서 이 책의 주요 필자들과 친분이 있어서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토론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 교수님뿐만 아니라 다른 필자들과도 관련이 있지만
편의상 대표집필자인 이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가 쓰는 글은 ‘세계인’ ‘자유인’을 지향하는 학자에게
시민적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언론인이 드리는 질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우파 세계주의자’에게 ‘우파 민족주의자’가 던지는 질문인 것이죠.

제가 그동안 써온 글이나 해온 말로 볼 때 사상적으로 우파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서술하는 내용이 ‘반일 종족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좌파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파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제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게
독자나 국민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글을 쓰기로 한 뒤에 먼저 저의 불편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원인의 하나는 ‘반일 종족주의’에 서술된 내용 자체보다
반드시 서술해야 하는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 책에서 제가 가장 불편함을 느낀 ‘독도, 반일 종족주의의 최고 상징’이란 글이었습니다.
   
   이 교수님께서 쓰신 이 글은 그동안 신라시대 이래 독도의 옛 이름으로 간주되던 ‘
우산도(于山島)’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섬이었다는 것을 고증하며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주장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사실상 무주지(無主地)였던 독도를 1905년 일본이 먼저 영토로 편입했고,
한국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인 1952년 1월
평화선 발표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은 실정”
“그로 인해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라고 주장합니다.
   
   ‘우산도’를 둘러싼 논란이나 17세기에 한국의 독도 영유권 확인에 크게 공헌한 안용복의 활동 산물인
‘울릉도 쟁계(爭界)’, 일본 막부가 발행한 ‘도해면허(渡海免許)’의 성격 등에 대한 해석 차이는
전문가들 사이에 심층 토론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라고 할 수 있는 ‘태정관문서(太政官文書)’에 대한 언급이 이 책에 전혀 없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뒤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
죽도(竹島·울릉도)송도(松島·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또 17세기 이후 만들어진 많은 일본의 고문서와 지도들이 송도(독도)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이들 자료를 이용한 일본한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가 독도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논증됐습니다.
   
   
▲ 1877년 일본 태정관이 ‘죽도(竹島·울릉도)와 그 외 일도(一島·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곳’이라는 결정을 내무성에 내려보낸 문서와 두 섬을 그린 부속지도.

   대한제국도 독도 침탈에 항의문서 작성했었다
   
   ‘반일 종족주의’는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영토 분쟁의 ‘결정적 시점(critical point)’이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국제법에서 말하는 ‘결정적 기일(critical date)’은 국가 간의 영토 분쟁에서 판정 기준이 되는 날로
그 이후에 발생한 사실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습니다.

일본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뒤 이를 알게 된 대한제국일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이와 상당히 다릅니다.
1906년 3월 울도군수와 강원도관찰사로부터 일본의 독도 침탈을 보고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즉각 항의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으로 1906년 1월부터 일제 통감부가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문서로 발송되지 못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항의문서규장각에 보관돼 있고
대한제국의 항의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주요 신문에 보도됐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제물(祭物)이 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독도 문제에 관한 ‘결정적 기일’은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이 아니라
1870년대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의 최고당국자가 작성한 ‘태정관문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본 정부와 직접 연결되는 메이지 정부가 확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태정관문서의 존재를 숨기거나 의미를 깎아내리지만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미국 판단 흐리게 한 패전 후 일본의 독도 팸플릿
   
   또 이는 국제법적으로 보아 1950년 연합국들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를 위해 작성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 일본 영토의 기준 일자를 ‘1894년 1월 1일’로 한 것과도 부합합니다. 연합국이 이렇게 정한 이유는
일본이 외부 식민지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청일전쟁 이후에 점령 또는 편입한 영토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05년 일본이 영토 편입을 선언한 독도는 당연히 일본 영토에서 제외됩니다.
   
   ‘반일 종족주의’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과 패전국인 일본 사이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체결을 한 달 앞둔 1951년 8월
국무부가 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에 보내온 회신이 소개돼 있습니다.
독도와 관련해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래 일본 시마네현 오기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결코 이 섬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회신에 대해 이 교수님께서는 “읽으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런 회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독도 연구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지은 ‘독도 1947’(2010·돌베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1947년 6월 ‘일본 본토에 인접한 소도서(小島嶼)(Minor Islands Adjacent to Japan Proper)’
라는 팸플릿을 간행했습니다.
일본어 제목이 ‘일본의 부속소도(付屬小島)’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팸플릿은 연합국들과의 강화조약에 대비하여 일본의 영토 범위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본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도서에 포함시켰습니다.
특히 “‘리앙쿠르암(독도)’은 한국 명칭이 없으며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팸플릿은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워싱턴의 미 국무부에 대대적으로 홍보됐고
독도에 대한 미국의 판단을 한동안 흐리게 했다고 교수는 설명합니다.
   
   하지만 영국·호주·뉴질랜드 등 다른 연합국들은 일본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는 지적이 잇달아 나오는 바람에
결국 미국중립적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당시 일본이 대미(對美) 선전전에 적극 나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도쿄에 진주한 연합국최고사령부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포하여
일본과 한국의 행정 관할 구역을 정하면서 제주도·울릉도·독도를 한국에 포함시켰습니다.
1950년 연합국들이 강화조약의 사전 준비로 작성한 ‘구(舊) 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는
대한민국에 이양하는 섬에 제주도·거문도·울릉도·독도를 포함시키기로 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유엔군과 미국 공군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설정하면서
독도를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독도를 점차 국제사회가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이를 뒤집고 독도를 일본 영토로 승인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이 특정 시기에 나온 미 국무부의 문건 하나가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1946년 1월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관이 일본과 한국의 관할 구역을 나눈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SCAPIN) 제677호의 부속지도.
독도를 ‘TAKE’로 표시하고 명료하게 한국 관할에 포함시켰다.

   독립 뒤 비약적 경제성장이 의미하는 것
   
   다음으로 검토해보고 싶은 글은 김낙년 교수님께서 쓰신 ‘일본의 식민지 지배방식’입니다.
저는 엄밀한 학문적 성과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서술된 이 글의 내용에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이나 상식과 다르더라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서술되지 않았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낍니다.
   
   “해방 전의 조선 경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통합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역내(域內) 무역이 활성화되고 산업구조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 과정은 당초 자본과 기술에서 앞선 일본인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조선인의 공장과 회사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김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그동안 교과서로 배웠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제를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김 교수님은 ‘일본인을 포함한 세계인이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일제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는 민족주의 역사교육’을 비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나라의 내일을 만들어갈 젊은 세대들의 그런 당혹감을 풀어주고
일제 통치에 대한 올바른 비판 능력을 길러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기성세대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단초가 김 교수님의 글에 이미 들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일제 시기는) 해방 후와 비교할 때 일본인과 조선인 간,
또는 조선인 내부에서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불평등이 매우 높은 사회였고,
경제성장률 또한 해방 후보다 2분의 1 속도로 느렸기 때문에
그 성장의 효과가 저변에까지 두루 미치지는 못했다.”
여기에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일본 경제권의 한 부분이어서
근대국가다운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갖지 못한 기형적 형태였다는 사실이 추가될 수 있겠지요.
   
   ‘반일 종족주의’ 62쪽에는 지난 100년간 한반도 주민의 ‘1인당 소득’ 장기추이 그래프가 표시돼 있습니다. 이 그래프의 광복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왜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는지
경제적 측면에서도 설명이 됩니다.
   
   일제시기 한반도 주민의 소득은 연평균 2.2%씩 증가했습니다.
평균적으로 한국인보다 부유했던 한반도의 일본인을 포함한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광복 후에는 연평균 4.9%씩 증가했습니다.
결국 일제시기에는 한국이 독립했을 때 달성할 수 있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일제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한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회적인 데 있었습니다.
김 교수님의 글은 이 부분도 언급합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동화주의를 추구했다.…
정치 면에서 보면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고,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런 동화주의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구호에 불과했다.”
일제시기 우리 조상의 대부분은 설사 경제적 풍요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권리를 빼앗긴 상태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조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담당할 몫이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모든 지식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무입니다.
이렇게 이 책이 충분히 서술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할 경우
일제시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역사적 사실은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일제를 올바로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길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식민지 근대화론’입니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비난하는 일부 인사나 언론이 꼭 ‘식민지 근대화론’을 거론하고,
이 책의 기저에 그와 관련된 쟁점들이 깔려 있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교수님께서는 지난 8월 17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그것은 남들이 붙인 것이다. 일제의 억압과 지배의 역사로만 보는 게 아니라
억압과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근대인으로 만든 한국인의 역사를 봐야 한다는 게 제 입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대 수용’ 앞장선 한말 애국계몽 세력에 주목해야
   
   이에 앞서 8월 16일 이승만TV에 올린 영상에서는
“일본 식민지 지배의 수탈성을 부정하거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며
수탈의 체제적 원리와 구조적 양상을 총체로 보자는 취지였다”고 해명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과 근대적인 법, 제도의 확립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힘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가 아니라
“식민지가 됐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주장은 이미 일제시기 이래 일본 학자들이 줄기차게 펴왔고
지금도 일본 우익 인사들의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이런 ‘오해’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일제시기 직전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이 교수님 등의 설명입니다.
고종이 이끌던 대한제국은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할 상황이었고,
정치적·외교적으로도 무능하여 망국(亡國)을 자초했다는 것이죠.
저도 역사학계 일각에서 내세우는 ‘고종 계몽군주론’은 상당히 무리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김용삼 기자가 ‘망국의 암주(暗主)가 개명군주로 둔갑하다’라는 글에서 설파했듯이
조선 왕조가 망한 주요 원인은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잘못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제국 시기의 우리 역사를
‘고종이냐, 아니냐’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평면적이고 단선적인 이해는 우선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또 그럴 경우 고종을 암주(暗主)로 보는 시각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할 뿐 아니라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인함으로써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연결될 우려가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의 우리 역사는 ‘자주적 근대화’의 주도권을 놓고
고종 등 집권세력과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민간 근대문명 세력이 경쟁을 벌인 시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전제군주국’을 선포하고
독립협회 세력을 탄압함으로써 민간 근대문명 세력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신민회 등 각종 애국계몽단체에 집결해 펼친 교육·언론·산업 등 자주적 근대화의 노력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사상과 인물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져
광복 후 대한민국이 비약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원천이 됐습니다.
   
   일제시기 국내에서 식민지라는 엄혹한 상황을 이겨내며
역시 교육·언론·산업 등을 통해 근대화에 힘쓴 민족주의자들의 역사적·정신적 뿌리도
한말에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민간 근대문명 세력이었습니다.
   
   이 교수님께서는 2016년 말 필생의 역저인 ‘한국경제사’(전2권·일조각)를 내셨을 때
제가 인터뷰에서 제2권의 부제 ‘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을
“‘근대의 수용’이라고 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애국계몽운동기에 우리 근대문명 세력의 활동이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겼고
그 이후 근대가 본격 이식됐다”고 답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19세기 후반 이래의 우리 역사는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민간 근대문명 세력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되겠습니다-의 고난에 찬 ‘근대 수용’ 과정으로 이해해야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근대에 접어든 뒤에 우리 민족이 걸었던 고난의 역사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찬란한 성공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음번 글에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룬 주제 가운데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논쟁]이영훈의 독도에 반박한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 글은 이영훈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에서 제기한
우산도는 환상의 섬이며, 석도는 관음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이영훈 교수의 우산도석도에 관한 주장은 일본 측 주장과 흡사하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 학자들이 비판한 연구 성과가 많다.
이 글은 그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필자가 속한 기관이나 단체와는 상관이 없음을 밝힌다.
   
   
   장한상과 안용복 이후 지도에서 울릉도 서쪽 우산도가 동쪽으로
   
   먼저 이영훈 교수의 우산도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그는 우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산도는 조선시대에 걸쳐 떠도는 섬이었습니다. 환상의 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 섬은 울릉도 동남 87킬로미터에 위치한 독도가 아니었습니다. 독도로 비정해도 좋을 만큼 근사한 방향과 위치에 우산도를 그린 지도는 단 한 장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왕조는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159~160쪽)
   
   여기서 논점은 조선 정부가 독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조선의 관리가 독도를 구체적으로 인지한 기록이 있다. 1694년 삼척영장 장한상은 조선 정부의 명령을 받고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쓴 ‘울릉도 사적(事蹟)’에는 울릉도 중봉(성인봉)에 올라 독도를 목격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대관령의 모습이 보이고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울릉도 정상인 성인봉에서 동남쪽으로 보이는 섬은 독도밖에 없다. 울릉도 주변에는 죽도와 관음도, 북저바위 등이 있지만 이들은 울릉도에서 직경 약 2㎞ 내에 있고 성인봉에서는 그 아래의 산과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장한상이 독도와 울릉도의 거리가 300여리라고 한 것은 실제 거리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가 중봉에서 울릉도 남쪽 해안까지의 거리가 40여리라고 했고, 울릉도 해안에서 독도까지의 최단거리가 222.5리(87.4㎞)라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근사치라고 할 수 있다.
   
   장한상이 본 독도의 방향과 위치가 그냥 일시적으로 파악되었다가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그때 장한상 혼자만 독도를 인지했을까. 대답은 역시 ‘아니다’이다. 장한상과 함께 울릉도에 간 수토군의 규모는 동원된 선박이 6척이고, 인원이 군관·역관·포수·선졸 등 150명이나 되었다. 장한상이 울릉도의 이곳저곳을 수색할 때 데리고 다닌 인원이 60여명이었음을 감안하면 그가 성인봉에 올라 독도를 조망할 때 함께한 군사도 그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장한상 수토군이 울릉도를 다녀온 3년 후인 1697년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수토하는 정책을 결정하였다. 울릉도 가까운 지역에 있는 월송만호와 삼척영장이 80명 내외의 병사를 이끌고 1699년부터 1894년까지 2년 또는 1년 간격으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1699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에 참가한 병사들도 함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목격한 독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그 후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14년 강원도 어사 조석명도 “울릉도 동쪽에 섬이 있고 왜경(倭境)에 접해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보고했다.(‘숙종실록’)
   
   장한상이 울릉도를 수토할 무렵 안용복은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과정에서 독도를 실제로 봤다. 특히 1696년에는 그가 우산도로 가서 일본인들을 직접 내쫓은 기록이 있다. 또 일본 기록 ‘원록구병자년(元祿九丙子年) 조선주착안(朝鮮舟着岸) 일권지각서(一卷之覺書)’(1696)에는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50리라고 그 거리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우산도의 방향과 위치를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고, 우산도가 일본에서는 송도(松島)라고 불린다는 정보까지 취득했음을 알 수 있다.
   
   안용복의 독도에 관한 진술은 ‘숙종실록’(1696)과 예조에서 담당하는 업무 전반을 기록한 ‘춘관지’(1745),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기술한 ‘변례집요’(1800년대 중엽) 등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리적 정보들이 바탕이 되어 ‘동국문헌비고’(1770)와 ‘만기요람’(1808) 등 국정 운영에 참고하는 중요 문헌에 ‘우산도는 일본에서 말하는 송도’라고 밝혔다. 또 이 문서들은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땅’이라고 하여 우산도에 대한 영유 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장한상 수토군의 독도 인식과 안용복의 우산도 활동은 그때까지 전해오던 우산도의 방향과 위치를 크게 교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1531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는 우산도가 울릉도에 버금가는 크기로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17세기 말 이후 지도에는 우산도를 울릉도 동쪽에 표시하고 그 크기도 울릉도의 3분의 1보다 작게 그렸다. 우산도의 변화된 모습은 18세기 중엽의 ‘동국대지도’, 18세기 말의 ‘아국총도’, 19세기 중엽의 ‘해좌전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조선 정부가 우산도를 실재하는 섬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표기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강원도와 울릉도를 함께 나타낸 도별(道別) 지도의 경우 우산도가 울릉도의 남쪽과 북쪽에 그려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지도상 지면의 공간 부족으로 울릉도의 동쪽에 그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1882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의 경우처럼 우산도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일시적으로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 의사나 의지를 포기했다고는 할 수 없다. 국제법에서 영토의 포기는 국가의 명시적 의사표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899년 ‘대한전도’와 1908년 ‘증보문헌비고’ 등 관찬사료와 1899년 황성신문 등에는 여전히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우산도를 언급하고 있다.
   
   
왼쪽은 1531년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들어 있는 팔도총도의 울릉도 부분. 우산도가 울릉도와 비슷한 크기로 울릉도 서쪽에 있다. 오른쪽은 18세기 중엽 만들어진 동국대지도로 우산도를 울릉도 동쪽에 울릉도보다 훨씬 작게 그렸다.

   석도(石島)는 울릉도 이주민들이 붙인 ‘독섬’ 뜻을 따라 표기한 것
   
   15세기 초 이래 왜구의 침탈을 피해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옮기고 섬을 비워두는 정책을 펴던 조선왕조는 1882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벌목과 고기잡이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울릉도 개척령’을 내리고 이주민을 모집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울릉도에 들어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독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더욱 뚜렷해졌다. ‘우산도’라는 지명을 몰랐거나 친숙하지 않았던 이들은 울릉도에서 바라보고 또 경험한 독도에 대해 그들의 언어로 새로운 이름을 붙여 사용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독도’의 유래가 된 ‘독섬’이다.
   
   울릉도 출신인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고향에 계신 노인께 독도의 옛 지명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그분은 1960년대까지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1940년대에 독도를 ‘독섬(Doksum)’이라고 부른 것은 1948년 우국노인회가 맥아더 사령부에 보낸 청원서나 1947년과 1948년 한성일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도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독섬’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유미림 ‘우리 사료 속의 독도와 울릉도’ 298쪽) 아마 독도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어 언론에 빈번히 등장하면서 ‘독도’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한다.
   
   19세기 말 이래 울릉도의 조선인들은 한자식 지명 대신 순우리말 지명을 주로 사용했다. 그래서 울릉도에 있던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죽도(대섬)의 경우 한인들은 ‘대섬’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죽도’라고 했다. 1970~1980년대까지도 울릉도 사람들은 죽도를 주로 ‘대섬’이라고 불렀다.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관광지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죽도’로 많이 부르게 되었다.
   
   ‘독섬’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일찍이 광복 직후인 1947년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방종현 서울대 교수는 조사 직후 쓴 글에서 ‘독도’ 또는 ‘독섬’이 ‘석도(돌섬)’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했다. 독도의 외형이 전부 돌로 된 것같이 보이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전라도 등 지방 방언에 의하면 ‘돌’을 ‘독’이라고 하는데, 독섬이 석도(돌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조사할 당시 울릉도에 있던 조선인 140명 중 115명이 전라도 지역에서 온 사람이었다. 지금도 전라도 고흥 등지에 가면 독도, 석도, 독섬으로 호칭되는 섬들이 있다.
   
   이처럼 독도를 부르는 이름은 ‘우산도’에서 ‘독섬’으로 바뀌었지만 그 존재와 영유 인식은 더욱 분명해졌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제정하여 근대 법령체계에 따라 울릉도의 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울릉전도는 울릉도 본섬을 가리키고, 죽도는 오늘날의 죽도, 석도는 독도를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독도를 ‘석도(石島)’라고 표기하여 울도군의 행정구역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1900년 10월 27일 관보로 고시되어 독도가 울도군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음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는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칙령 제41호의 석도는 오늘날의 관음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나 학자들은 석도가 독도라고 주장합니다.…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독도를 몰랐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165쪽)
   
   우선 이 교수는 ‘석도는 관음도’라는 주장에 대해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현재 울릉도의 부속도서로는 독도 외에 죽도(竹島), 관음도(觀音島) 등이 있다.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고 전제해놓고, 칙령 제41호에 죽도가 따로 있으니 관음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음도가 ‘석도’ ‘돌도’로 불린 적은 없었다. 1900년대 그리고 그 후에도 관음도는 관음도라는 지명 외에는 관음기(觀音崎), 깍개섬(깍새섬) 등으로 표기되거나 호칭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독섬’을 ‘석도’로 표기했을까. 이는 당대의 저명한 국어학자였던 방종현 교수가 일찍이 ‘독도=독섬=석도=돌섬’으로 설명한 바 있다. 해석건대 독섬은 돌섬을 의미하고 석도와 독도는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즉 ‘석도(石島)’는 ‘독섬(돌섬)’을 그 뜻을 따라 표기한 것이고, ‘독도(獨島)’는 그 음을 따라 표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966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공개되기 이전에 나온 것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는 1900년 정부에서 파견한 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의 보고서 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석도는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부르는 ‘독섬’을 그 뜻을 따라 표기한 것이다. 한편 1906년 심흥택 울도군수의 보고서에 나오는 ‘독도’는 음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방종현 교수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 1911년 미국에서 간행된 이승만의 독립정신초간본에 들어 있는 죠션디도의 울릉도 부분. 울릉도라는 글자의 왼쪽에 있는 글자와 큰 섬 아래 표시된 작은 섬 두 개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 오른쪽은 같은 지도의 제주도 부분.

   ‘죠션디도’의 두 섬은 죽도와 독도로 봐야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영훈 교수가 석도가 독도와 무관함을 증명할 지도라며 제시한 ‘죠션디도’에 대한 필자의 소감을 적고자 한다. 이영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교민들이 출간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란 책에 실려 있는 ‘죠션디도’입니다.… 울릉도 바로 남쪽에 ‘돌도’가 붙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도’가 곧 석도입니다. 다만 울릉도 동북에 있어야 할 섬을 남에다 그린 것은 착오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칙령 제41호 중의 석도가 동남 87킬로미터 해상의 독도가 아님은 이 지도의 발견으로 더없이 명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반일 종족주의’ 168쪽)
   
   이영훈 교수는 그 지도에서 울릉도 왼쪽에 표기된 글자를 ‘돌도’라고 읽었다. 그리고 그 ‘돌도’가 곧 ‘석도’라는 것이다. 그 돌도, 곧 석도는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에 위치하지 않고 울릉도 본섬에 바로 붙어 있으니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지도상의 표기를 ‘돌도’가 아니라 ‘울도’로 읽었다. 글자가 조금 뭉개져서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어 해상도가 좀 더 높은 지도를 보았지만 더 한층 ‘울도’로 읽혔다. 1904년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저술할 당시 울릉도의 행정지명은 ‘울도군’이었다. ‘죠션디도’에 표기된 다른 지명을 보면 ‘군(郡)’이라는 글자를 제외하고 행정지명을 표기하고 있다. 제주도를 보면 섬의 명칭인 ‘졔쥬섬’과 행정지명인 ‘졔쥬’를 함께 쓰고 있다. 또한 1907년 ‘대한전도’를 보면 울릉도에 한자로 행정지명인 ‘鬱島(울도)’를 표기하고 있다.
   
   이영훈 교수는 이 지도의 ‘돌도’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나오는 ‘석도’이고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주장했다. ‘죠션디도’의 울릉도 왼쪽 표기를 ‘돌도’로 읽는다면 울릉도 남쪽의 두 개 섬 중 어느 것이 ‘돌도=석도=관음도’에 해당하는가. 오히려 필자는 이 두 섬이 칙령 제41호의 죽도와 석도로 대섬(죽도)과 독섬(독도)을 표기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음도는 울릉도 육지에서 10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전도에 표시할 정도의 규모는 되지 않는다.
   
   이영훈 교수는 그 섬이 울릉도 동남쪽 ‘87킬로미터’ 해상에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방향에 대해서는 ‘울릉도 동북에 있어야 할 섬을 남쪽에다 그린 것’은 ‘착오’라며 수용하면서도 위치에 대해서는 ‘87킬로미터 해상의 독도가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이것은 매우 자의적인 이중 잣대이다.
   
   다른 사람들도 “독도가 울릉도에서 87.4㎞ 떨어져 있는데 울릉도 바로 옆의 섬을 독도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지도상 지면의 공간 부족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렇게 표기하는 것은 사람의 인식 체계와도 관련이 있다. 말하자면 그 섬에 대한 존재 인식과 영유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성항법장치(GPS)와 같은 측량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오늘 저녁에도 TV의 뉴스 끝에 하는 기상예보를 보면 독도는 죽도(대섬)가 있는 자리에 그려져 있다. 마치 조선시대 고지도의 우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기상캐스터에게 “울릉도 옆 동쪽 또는 동북쪽에 있는 그 섬은 어떤 섬입니까”라고 물으면 ‘독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그 섬을 ‘죽도(대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어제의 우산도’와 ‘오늘의 독도’는 독도에 대한 존재 인식과 영유 의사를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고자 한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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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은 원래 '1948815일 정부수립일'을 뜻했다


조선일보
                             
             
입력 2018.08.13 03:00

이영훈 교수, 내일 학술대회 발표1949815일 독립 1주년 기념식
민간에선 '광복''해방'으로 혼동, 역대 정권도 '건국 기억'을 홀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대한민국 건국의 기억은 당초 '독립기념일'이었던 815일이 '광복절'로 바뀌면서 혼란스러워졌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역대 정권이 이를 외면하거나 폄하하면서 약해져갔다."

이영훈〈작은 사진〉 전 서울대 교수가 14일 오후 3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이승만학당(교장 이영훈)과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 공동 주최로 열리는

'건국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오늘까지 건국 기억의 성립과 변질 과정을 추적한다.


1949815 정부'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고 했다.
그해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의 4대 국경일 명칭은 3·1, 헌법공포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이었다.
그런데 국회 심의 과정에서 헌법공포기념일은 '제헌절', 독립기념일은 '광복절'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1950년 8월 15일 대구에서 '2회 광복절' 기념식이 개최됐고,
1951년 8월 부산에서 '3회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억을 간직했다.
1953년 8월 '독립 제5주년 기념식'이 거행됐고, 1958년엔 '건국 10주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열렸다.
기념 화보집·사진집이 발간됐고, 1948년 8월 15일 태어난 '건국둥이'들이 꽃수레를 타고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1949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 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은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
19498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모습.
중앙청 건물 윗부분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
한번 뭉처 민국 수립, 다시 뭉처 실지 회복
독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민에게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광스럽게 회복한다'는 뜻을 지닌 '광복(光復)'은

민간에선 '일제(日帝)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로 이해됐다.

1950년부터 일부 언론이 광복절의 주기(週期)를 1945년 8월 15일부터 기산하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끝난 1954년 무렵 광복절의 기년(起年)은 1945년으로 굳어졌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불명예 퇴진한 뒤 들어선 정권들은

자신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해 이승만과 그가 주도한 '건국'을 깎아내렸다.


1960년 8월 '1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윤보선 대통령이승만의 독재정치비난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제헌헌법의 전문(前文)에 들어있던 '민주독립국가의 재건'이라는 대한민국 성립에 관한 서술을 삭제했다.

'조국 근대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던 박정희는 대한민국 건국을 중시하지 않았다.

건국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공백을 감성적·종족적 민족주의가 채우는 한편으로

대한민국의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좌파 세력이 강력하게 치고 들어왔다.

민중민족주의 역사관

한국근현대사의 기본 과제가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 민주 혁명이었는데

미군정과 대한민국에 의해 좌절됐다고 주장했다.

우리 근 현대사

"친일파 세력이 중심이 돼 지배해 왔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고 규정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역사관이 교과서 등을 통해 급속히 퍼져갔다.

이영훈 교수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시대착오의 좌우합작이 벌인 혼란의 한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다"며

"1948년의 건국 이념을 올바로 회복·계승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3/20180813001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