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7.06 15:23 | 수정 : 2018.07.06 16:54
- ▲ 김지수 디지털 편집국 문화부장
‘88만 원 세대’라는 책으로 유명한 경제학박사 우석훈 씨는 재미난 사람이다.
한때 유엔 정책분과 의장이자 총리실 전문위원으로 살았던 그는,
50대가 돼서 ‘명예욕'은 다 내려놓았다고 했다.
역시나 박사 학위 소지자이자 결정적으로 태권도 유단자인 아내를 ‘떠받들며’,
정규직 아내 대신 육아와 집안 살림을 전담한다.
‘놀아도 놀아도 끝이 없는' 7살 5살 남자아이와 늙은 아빠의 일상은 단내와 땀내로 날마다 흥건하다.
아내는 일하다 달려와서 그가 해준 국수를 맛있게 먹고,
그는 다음번엔 아내를 위해 들깨 수제비를 만들어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마냥 집에만 있지는 않는다.
아내의 빨간 모닝을 타고 다니며 짬짬이 일도 하고 친구도 만난다.
아이들에게 삼겹살을 구워주고 저녁 식탁에 수제 캔맥주를 올리며
‘살면서 요즘처럼 걱정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그의 SNS 글을 읽으면
‘행복이 뭐 별건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석훈 박사 쓴 책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를 남편 방에 슬쩍 밀어 넣고 싶은 충동에,
허벅지를 꼬집었다.
‘꼰대들의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아내 대신 ‘아내가 된' 그의 ‘현실적인 선택' 앞에서
다른 남편들은 뭐라고 할까?
‘엄마 친구 아들'처럼 괜한 판타지로 분란을 일으키는 ‘이웃집 남편'을 원망할까.
미국의 여론조사 권위자인 마크펜은 최신 저서 ‘마이크로 트렌드 X’에서
더 많이 버는 아내를 대신해 집안일을 전담하는 이런 남편을 ‘이인자 남편(Second-fiddle husbands)'
으로 정의하며, 전 지구적으로 머지않아 이런 ‘이인자 남편’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미 영국에서는 부인이 주요 부양자인 경우가 21%며,
이 비율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유럽 연합 18개국에서 증가했다.
- ▲ 미국의 여론조사 전문가 마크펜은 이인자 남편 트렌드는 미국에서도 두드러지지만
- 더 큰 충격을 받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지적한다./픽사베이
사실 나는 예전부터 이런 식의 이인자 남편을 주변에서 많이 목격했다.
패션 디자이너 A와 대기업 명예 퇴직자 B 부부는 대체로 현명하게 이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남편 B는 아내 A의 회사 재정과 가정의 제반 문제를 관리하는 집사 역할을 한다.
A는 어느 자리에서나 “내 남편이 실제 주인이고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말로
이인자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곤 한다.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C와 만년 영화감독지망생인 남편 D 커플도
몇 년째 남편 D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고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D가 부부 모임에 나타나지 않고, 대인기피증세가 생겼으며,
시시때때로 C에게 “나를 보모 취급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것만 빼면.
이인자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 역할'을 ‘일시적인 추락’으로 해석할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진작가 E와 몇 년 째 일이 끊긴 작곡가 F는 최악이다.
E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남편은 면피용으로 최소한의 집안일과 육아만 챙겨. 어쩔 수 없이 가정부를 따로 고용했지.
이혼하려고 변호사를 만났더니 내가 그에게 위자료를 엄청 쥐여줘야 한다더군.”
고소득 여성은 앞으로 이혼할 경우 이인자 남편들에게 매달 생활비 등 고액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 것이라고 ‘마이크로트렌드X'도 이미 예언했다.
통계적으로 보면 아내의 소득이 가정 전체 소득의 60%를 넘어서면 이혼할 확률이 높아진다.
전문가들은 부인이 수입이 남편보다 많을 때
‘남편의 열등한 지위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즉 ‘지위 누수'가 발생하며,
이 감정이 심해질수록 남성의 마음엔 자괴감과 원망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마크펜은 이때 남편들이 일인자 부인을 아니꼽게 여기는 마음에서 벗어나,
‘직장에서는 실패할지라도 가정에서는 다정하고 믿음직한 남편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마음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어쩌면 이인자 남편 트렌드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결혼식장에 들어선 남자들에게 ‘
직장 불안'과 ‘부양 강박증'을 떨치게 해줄 하늘의 선물이라는 것.
일찍이 여성학자인 메릴린 엘롬은 ‘아내’라는 책에서
‘아내는 남자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정의했다.
아내가 남편의 재산이었던 고대부터 슈퍼우먼이기를 요구받는 오늘날까지, ‘아내 잔혹사’를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인 ‘아내’가 되기를 요구받는 남편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일까
싶다.
이인자 남편의 성공 여부는 우석훈 박사의 경우처럼
일상의 작은 행복의 연금술사로서 자신의 위치를 리세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문득 문정희 시인의 시 중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떠오른다.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전통적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듯, 우리 모두 멸종 위기에 있는 ‘아내’에 대해서도 애잔함이 남아있다.
그러나 앞으로 전통적인 아내에게 요구되던 완벽히 수용적인 역할은 ‘상호작용 로봇'의 몫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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