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그리고 호칭들"
(신달자/시인)
나는 ‘가시나’로 태어났다.
다섯째 딸로 태어나 “또 가시나야!”로 내 인생은 출발했다.
딸 부잣집 다섯째 딸은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고
가시나에서 소녀로, 다시 여학생이 되고, 아가씨가 되고, 다시 이름도 우쭐한 여대생이 되었다.
처녀에서 드디어 여자가 되었고, 어느 날 여류시인이라는 말에서,
신부라는 황홀한 이름에서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무거운 이름, 며느리가 되기도 했다.
물론 주부라는 명예도 얻었다.
이름 따라 역할이 다 달랐지만 역할 이해가 되지 않은 채 여자의 일생은 막막했다.
집안이 내 손에 달렸지만 실세는 아니었다.
시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모·고모라는 호칭도 들었다.
새언니라는 이름도 저절로 붙었다. 어느 하나 가벼운 이름은 아니었다.
모두 책임이 따르는 이름들이었다.
더 무게가 있는 이름, 안사람에서 집사람이 되었고 집식구 그리고 처(妻)가 되었다.
더러는 여편네가 되기도 했다.
더 힘 있는 말은 아줌마였다.
여자·엄마·아내·며느리를 다 합친, 무게가 제법 나가는 아줌마 말이다.
거기 한국의 아줌마라고 하면 힘은 더 실릴 수 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여성’이라는 말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여류라는 말이 사라지고 여성시인이 되고 여성교수가 되었다.
여러 협회에 이사가 되거나 회원이 되면 여성회원, 여성이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장모님이 되었고 드디어 할머니가 되었다.
이 이름들을 살아 내느라 진땀이 났다.
김연아처럼, 박지성처럼 넘어지고 또 넘어졌을까.
그만큼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것이 생활이었다.
그 어느 것도 쉬운 이름이 없었다.
그 어느 하나 벗을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금메달은 없었다.
그러나 금메달은 반드시 받게 돼 있을 것이다.
가시나로 살 때는 편했을까.
세 살 어린 남동생과의 차별 때문에 나는 힘들었다.
늘 좋은 것은 동생 차지였다.
그 남동생이 태어나 준 것이 고마워 나는 언제나 양보했다.
대학 시절, 그 남동생 밥을 해 먹이며 자취를 했다.
반찬은 뭘 했느냐고 엄마가 전화를 하루 두 통씩 해댔다.
딸이라는 이름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늘 약자였다.
계집애 소리는 서울 사람들이 불렀다.
왠지 근사한 이름 같기도 했다. 사근사근했다.
그러나 늘 고민에 빠져 있었고 열등감이 깊었다.
여대생이라는 말도 아름다웠다.
사과 향이 났다.
아가씨라는 말도 서울 사람들이 불렀다. 그 또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며 괴로웠다.
그리고 처녀라는 말에는 농도가 깊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이 호칭은 시한부다.
그래서 즐겨야 하는데 고민만 하다가 기회를 다 놓쳐 버렸다.
여류시인이라는 말에는 더 무거운 표정 관리가 필요했다.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다. 가슴이 뛰었다.
아마도 잘잘잘 가슴이 뛰고 향이 배어나는 시간은 어쩌면 여기까지인지 모른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며느리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다.
한 가정의 주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부터 언덕에 오른다는 뜻이다.
아니 태산을 맨발로 오른다는 뜻이다.
많은 호칭을 살았지만 가장 힘겨운 것은 그래도 ‘엄마’였다.
그것은 도무지 일류가 될 수가 없었다.
늘 미안하고 늘 고마운, 그러나 내게 사랑이라는 깊은 의미를 뼛속 깊이 느끼게 해준 이름이었다.
아내, 안사람, 집사람은 어떤 것이었나?
여자로서 그래도 한 번은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한, 이름도 아늑한 ‘아내’라는 호칭은
대가를 너무 많이 치러야 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억지 사랑까지 내가 다 쏟아부어야 하는 아내라는 말을 나는 이미 졸업했다.
20년을 넘게 환자였던 그에게 너무 잘했다고 큰소리쳤지만, 아니다.
나는 탄식만 했지 그를 사랑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내가 손해만 본다고 느낀 남편과의 사랑에는 못해준 것이 많다는 생각을 지금에야 한다.
너무 힘겨운 것이 엄마였고 아내였지만
이 두 가지의 호칭 때문에 좀 더 잘 살아 봐야 한다고 두 손목을 아침마다 쥐었는지 모른다.
나를 사람으로 교육시킨 이름들이다.
나는 지금 그 두 개의 호칭에 감사하고 고개를 숙인다.
날마다 기도하게 하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좋다고 느끼는 것은 ‘할머니’라는 이름이다.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안되는 것은 포기를 하고 남들을 존경하고 낮게 낮게 감사할 줄을 아는 이 나이가 좋다.
하느님이 너무 착하게 살았다고 20대로 돌려준다고 하면 "아이구 아닙니다" 하며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No’다.
혼자 외로운 아침도 저녁도 좋다.
그리고 나의 짝사랑은 무르익었다.
손주들은 이미 고등학생, 대학생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만큼 그들에게서 오는 것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래도 그 손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분명히 짝사랑이 맞는데도 나는 지금 느긋하다.
그리고 행복한 할머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릿한 이 너무 젊은 남자들,
이 씩씩한 손주들의 자라는 키만큼 내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다.
바라는 만큼의 기도가 필요하다.
여자로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내게 없지만,
아니 세상을 바꿔 보려는 노력도 해봤지만, 여기까지 살아온 힘은 세상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에게 붙는 많은 호칭만큼 여자는 힘이 센 것 아닌가.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이 마음 여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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