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5.05 03:02
[이혜운 기자의 살롱]
1980년대 한국경제 도약기 이끈 사공일 세계경제硏 이사장…
그가 말하는 리더십과 처세의 비결
리더십의 첫째는 실력, 둘째 사심 없어야 하고, 그 다음은 솔선수범
한국 정치판에서 명예를 지키긴 어렵다.
"권불십년, 정치는 하지 마라"
―김영삼 대통령 때만 임명장을 안 받으셨네요.
"김 대통령은 저한테 국회의원 하라고 수차례 제안을 했어요. 대구 어딘가 구(區)까지 정해서.
―많은 국회의원은 해본 직업 중 정치가 가장 재밌다고들 합니다.
"박태준 총재가 아침에 전화해서 그래요. '사공 장관 국회의원 하라고'. '정치는 안 합니다' 그랬지.
―한번쯤 출마하셨을 법도 한데요.
"우리 아버님이 한학을 하셨어요. 시골에서는 부잣집 소리를 듣는 가정의 육남매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적 꿈이 궁금합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
―정치도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출마했으면 뭐 (국회의원) 했겠지. 그리고 안양교도소를 들락거렸겠지(웃음).
수석론(首席論) "뒤에서 일하라"
지난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년인사회에서
―4년 최장기 청와대 경제수석 기록이 아직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내가 수석 할 땐 대통령이 신임하면 전적으로 맡겨주고, 건의한 건 거의 다 들어주고 했어요.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장관 시절, 어떻게 달랐나요?
"내가 아무리 '실세 장관'이었다고 해도, 청와대 나가면 다 권력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그 시절이 경제 호황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당시 고속 성장으로 누적된 부작용이 많았어요.
―문민정부로 바뀌고는 검찰 수사를 받으셨는데요.
“5공 비자금은 정치 이슈죠. 내가 재무부장관을 할 때는 선거자금법 이런 게 없었어.
―청문회부터 국정감사까지 살아남으신 처세의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니고. 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는데. 사심 가지고 한 건 전혀 없으니깐.
내가 부실기업 정리하니깐
사람들이 틀림없이 정치적인 결탁 있었을 거다 해서 청문회도 하고 국정감사도 하고 검찰 조사도 했는데,
난 국정감사가 좋더라고. 설명할 수 있게 장을 펴주니깐.
저는요, 법적인 게 아니고 정책이 잘못됐다고 그 사람들을 처벌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실기업 정리할 때 정치권에서는 경남기업을 왜 김우중에게 줬느냐며
분명히 돈 먹고 줬을 거라며 말이 많았어요.
그때 우리 근로자들이 중동에 몇만 명 나가 있었고, 건설 중인 것도 많았어요.
부도가 나면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 장부를 다 까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외채를 못 빌리니까 국가 부도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한 게 제삼자 인수예요.
그럼 이걸 누가 (인수) 하겠느냐는 거야.
나하고 김만제 재무부장관하고 힐튼호텔에서 제일 먼저 정주영 회장님 보자 했다고.
정 회장님이 이명박 당시 건설 사장님과 같이 들어오셨어. 왜 들어온지 아니깐 이미 결심이 섰더라고.
정 회장이 ‘어, 이 사장 어떻게 생각해?’ 이러니깐, 이 사장이 ‘아이, 안 됩니다.’ 이래요.
그러면 김우중 회장 들어오라고 했지. 김 회장은 ‘오케이, 하겠습니다’이래요. 그래서 거기로 간 거예요.”
―그때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신 건가요?
“청와대 수석 할 때 이명박 대통령은 여러 번 만났죠.
정 회장님은 그때 전경련 회장을 했기 때문에 청와대에 정책 건의하러 종종 들어오셨어요.
이 대통령과 개인적으로는 식사 한 번 같이한 적 없어요.
그러다가 이명박 당시 후보가 첫 당내 경선할 때 직접 찾아와서 ‘경제 고문으로 도와달라’ 하더라고.
‘나는 캠프에는 안 간다. 대신 경제 중진들이 모인 조찬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지.
이후 당선되던 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국경위)’ 위원장 제안하더라고.”
―그때 G20 정상회의준비위원회 위원장도 하셨습니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제가 대통령을 대신해서
(2008년 10월)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세계정책) 회의에 참석했어요.
그때까지 회자되던 G14에는 한국이 안 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에비앙에서 연설하면서 꼭 한국이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지.
그랬다가 파리로 갔는데, 거기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외교 안보 수석인 장 다비드 르비트와 친해졌고.
G20 첫 회의는 워싱턴에서 하고, 그다음에 런던에서 회의하는데, 미국이 대통령 인수인계로 바쁘니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밑에서 G20을 총괄한 존 컨리프라는 보좌관이 같이 일할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미국 프레드 버그스텐한테 하소연을 하니,
버그스텐이 ‘한국의 사공일하고 같이 일하라’고 알려준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나중에 한국이 의장국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됐지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여소야대 때 청와대 경제수석 하고 재무장관을 했지만, 다 잘 지냈어요.
내가 금리 자율화한다니깐 야당 의원이 나한테 와서
‘사공 장관,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뭐 이렇게 골치 아픈 거 하려고 하노’ 하면서 말릴 정도였어요.
사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직접 같이 일한 적도 없는데,
그 밑에 사람들이 날 좋게 이야기해서 알게 된 거예요.”
―무역협회장 연임을 사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임기가 다 돼 그만둔 거지. 위에서는 ‘연임을 해라’고 했는데,
‘난 안 한다. 난 연구원으로 돌아간다. 후배들에게 이런 선배들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했지.
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자리 욕심이 더 안 나시던가요?
“내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이에요.
모든 일을 성실히 하면 운도 따르는 거고. 운은 따르려고 해봐야 따르지도 않고요.
리더십이라는 게 첫째는 실력이 있어야 해요. 두 번째는 사심이 없어야 해. 그다음은 솔선수범해야 해요.
내가 늘 그랬어요. ‘정치적으로 억지로 해서 성공한 사람 중 끝까지 간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고.
정치로 선 사람은 반드시 정치로 망하게 돼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항상 그 말씀 하셨어. ‘순리대로 살아라.’”
정치로 선 자, 정치로 망해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가고 싶었어. 서울대 상대 졸업한 뒤 등록금 면제해준다고 해서 UCLA 갔죠.
그랬더니 담당 교수가 외국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니깐 날 시험지 점수 매기는 ‘리더’를 시켰어요.
이걸 열심히 하니깐 RA(리서치 어시스턴트) 하라고 해. RA 한 학기 하니깐 또 TA(조교) 하라더라고.
내가 첫 미국 생활을 유대인 변호사 집에서 했어요. 그때 부자들이 외국 학생들 도와주고 했거든.
그러니 영어를 옳게 배웠지.”
―귀국은 어떻게 결심하셨나요?
“뉴욕대 교수하다 영국 초청 교수로 가는 길에 노모 뵈러 잠깐 한국에 들렀는데
당시 김만제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이 내가 오는 걸 아시고 점심 같이하자 한 거예요.
갔더니 나보고 빨리 KDI 나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NYU 가서 1년 더 가르치고 귀국했죠.”
―청와대행은 빠르셨습니다.
“내가 KDI에서 부원장 하다가 산업연구원 원장으로 가 있는데 아웅산 사태가 일어나. 10월 9일 한글날.
그러니깐 대통령이 그 다음 날 오셔서 나한테 청와대 들어와 수석 하라고 했어요.
내가 ‘김만제 원장은 KDI를 11년을 해서 세계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는데,
저도 가능하면 산업연구원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습니다’고 하니
대통령이 ‘안 돼, 지금 김재익 수석도 없고, 경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해’ 하시더라고.”
―IGE는 어떻게 세우셨나요?
“노태우 대통령 때 전면 개각으로 장관직 떠나 IMF 초청받아서 미국 가서 책 쓰고 돌아오니
노 정권에서 ‘산하기관 하나 골라’ 하시는 거예요. 내가 ‘산하기관장 필요 없습니다. 연구원 할 겁니다’ 했지.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데 정책·기업 한다는 사람들 머리 안 바꾸면 안 되니깐.
그때 시작한 게 벌써 25주년 됐어.
정부에 있는 후배들이 도와주겠다 했지만 ‘후배들한테 신세 지는 건 독립성도 없어지고 싫다’ 했죠.
그래서 조그맣게 시작한 거야.”
―IMF 총재 자리에도 계속 거론됩니다.
“2007~8년에 워싱턴 지식인 중심으로 신흥국 사람이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지.
그때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이 공개 연설하면서 날 추천해서.(웃음)
‘내가 너의 캠페인 매니저 할 게’이러면서 하라더라고.
내가 ‘워싱턴 가서 뛰어다니고 그러는 거 원치 않는다’ 했지.”
―해외 명사들과 친분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세상 제일 바쁜 사람들이랑 친하려면 사람이 ‘나이스하다’ 정도론 안 돼요.
대화가 되고, 그쪽에서 얻을 게 있어야 해요.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는 이유예요.
난 아직 은퇴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계속 이렇게 현역 활동을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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