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15) 김종필(1926~2018)

colorprom 2018. 3. 3. 18:15

[Why] 낭만적 기질의 그에게 권력 넘어갔다면, 정치판 달라졌을 수도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8.03.03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5) 김종필(1926~)

육사 8기 동기생들이 JP를 위해 일을 꾸미면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박정희에게 가져다 바쳐

혁명의 주역이었지만 한번도 정권에 집착안해
그는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인이 아니었다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이철원 기자
새벽녘 김종필에 관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더니
1940년대 내가 즐겨 부른 뒤 그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이 노래가 갑작스레 생각났다.

'반월성 너머 사자수 보니/ 흐르는 붉은 돛대 낙화암을 감도네/
옛 꿈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고란사 저문 날에 물새만 운다/
물어보자 물어봐 삼천 궁녀 간 곳 어디냐/ 물어보자 낙화 삼천 간 곳이 어디냐.'

김종필은 1926년 충남 부여의 비교적 부유한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에 가서 중학교를 마치고 대전사범학교를 거쳐 어느 초등학교에 부임했지만 얼마 뒤에 그만뒀다.
들어가기 어려운 경성사범학교 연수과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편되는 바람에
3년쯤 공부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버느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내가 김종필에 대해 아는 것은 대부분 그의 절친한 친구이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평양사범학교 출신
육사 8기생 석정선에게 들은 것이다.

석정선은 60년대 후반 가족과 함께 보스턴으로 가 살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김종필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말을 잘하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겠지만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서예도 상당한 수준으로 익혔다. 그래서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엮어나가는 그의 이야기에서는 유식한 면이 엿보였다.
훤칠한 몸매에 잘생긴 얼굴, 학생 때부터 말도 타고 그림도 그려 어지간한 수준이었고 골동 취미도 대단해
만일 그가 고미술에 전념했다면 전형필 간송미술관 못지않은 미술관을 하나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어느 한 가지 일에도 집착하지 않는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석정선의 말에 따르면 8기생들이 김종필의 정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한 가지 일을
꾸며 놓으면 김종필은 그 기회를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가 모시던 박정희에게 가져다 바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대권에 도전하지도 않았고 대권을 휘어잡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운 친구를 아무도 없는 데서 만나면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대신 남자 지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꼭 잡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료한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가 친구들과 함께 육사 8기생으로 군에 입대한 사실은
김종필 한 사람만의 운명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소위로 임관하고 정보 계통 장교로 요직을 맡았던 그는 진급도 가장 빨랐다.
다른 육사 8기생들은 자신들의 진급이 왜 이리 더디냐며 불만을 가졌다.
자기 일은 아니었지만, 김종필은 4·19를 치르고 총리가 된 장면을 8기생을 대표해 찾아가
그 부당함을 호소했는데 그것이 '하극상'으로 되잡혀 상당수 8기생과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었다.

불명예제대를 강요당한 8기생 중에는 사범학교 출신의 머리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셋집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빈털터리로 살길이 막연해 거리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종필이 친구를 따라 당대 유명한 관상가 백운학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백운학이 친구 관상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김종필을 보더니 대뜸
'당신 혁명을 할 관상을 가졌어. 혁명하면 성공할 거야'라는 말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확인하지 못했다.
매우 합리적이던 그가 점쟁이 말을 듣고 혁명을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지럽기 짝이 없는 민주당 정권하의 세태를 바라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터에
군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박정희와 사이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종필5·16 군사혁명의 주역이고 그 혁명을 성공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그는 한 번도 정치나 정권에 집착하지 않았다.
군사혁명을 자랑하지 않았고 5·16 군사혁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그는
"이 나라 역사에 다시는 혁명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당의장이 됐고 국무총리 자리에도 올랐으며
아홉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명실공히 정치권력의 2인자가 됐지만,
흔히 있는 정치인들과는 생리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인이 아니었다.

혁명으로 시작 해 18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박정희
왜 혁명 주역이던 김종필에게 권력을 넘길 절차를 밟지 않고 있다가 10·26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인 민주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가 대권을 잡게 됐더라면 한국 정치가 오늘의 이런 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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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2/2018030201403.html


이수중(isopropylami****)2018.03.0413:11:29신고
김종필은 혁명주체로써 5.16의 설계자이자 3공화국의 산파역할을 했습니다.
10.26 이후, 최규하 대행이 김종필씨에게 통일주체회의의 대통령 출마를 권하면서,
개헌작업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당당하게 개헌 후 출마하겠다고 거절한, 패기와 지성과 양식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후 전두환 보안사에 끌려갔다 온 이후에, 많이 변질되었다고 판단합니다.
박형숙(eaglefl****)2018.03.0401:10:30신고
김종필부터 이회창까지 보필했던 총리실 사람이
김종필은 가장 편하게하는 똑똑하고 게으른 스타일
이회창은 다소 힘들게하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스타일이라고 했죠.
그랬던 양반이 왜 김대중과 연합을 해서 대통령만들어주고.. 한마디로 죽쒀서 개주고
나라까지 이렇게 빨간애들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었는지 참...
516혁명으로 나라를 구하고 다시 나라를 시궁창으로.. 아이러니.
jay ho kim(blueman****)2018.03.0323:38:59신고
이시대에 김종필씨나 김동길씨는 대한민국에서는 아주 훌룡한 인재입니다...
이분들의 지나온 발자취를 흟어보면은 이시대의 젊은이들이 본받을 감성과 운치가 풍부한 분들입니다.....두분 존경합니다!
김창진(star****)2018.03.0321:58:50신고
박정희는 왜 혁명 주역이던 김종필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아 10·26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낭만적 정치인 김종필 손에 권력이 넘어갔다면 좀 더 합리적인 민주화가 되지 않았을까. 그가 대권을 잡았더라면 한국 정치가 오늘의 이런 꼴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동감이오.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에게 대권을 넘겼더라면 그 뒤의 비극은 없었을 것을. 안타깝다.
공석근(b****)모바일에서 작성2018.03.0321:03:10신고
"인생무상" 김재순 전 샘터회장 , 종필을 만남후. 선 ㅡ 브론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02/2018030201403.html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9년 뒤 문재인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깨어있는 시민정신'이라는 씨앗을 뿌렸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폐허를 딛고 싹을 틔웠다.


지금 세상을 주름잡는 진보 정치는 노무현은 노무현대로, 문재인은 문재인대로

각각 자기 시대에서 제출받은 숙제를 해냈기 때문에 꽃을 피웠다.  

"배고픈 나라는 민주주의도 못한다"
그는 5·16때 진보적인 군부 운동권
노무현이 진보 정권의 씨 뿌렸듯이 김종필도 보수 부활의 터 될 수있어

신보수, 유머와 여백 있어야 안 질려
자유민주주의는 불멸의 국가 가치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미국, 약한 동맹국은 언제든 버려"

애민하는 좋은 공산주의자도 있다
김정은에 선대 좋으나 환상은 금물, 정권 오만해지면 순식간에 뒤집혀
평생 남긴 재산 신당동 집 한채가 다

  
십여일 전 세상을 뜬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부여 고향에 아내와 함께 묻혀 있는데
생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JP의 죽음은 가을에 오동잎 떨어지듯 자연스러웠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색깔이 달랐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들이 하기에 따라 김종필의 죽음도 노무현의 씨앗처럼 어떤 신호탄이 될지 모른다.
그것은 아마 '보수 재생(再生)'의 신호일 것이다.    
    

기질적으로 살필 때 전형적인 진보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편이다.
반면 보수인은 지난 시절 경험했던 최선의 상태를 오늘에 재현하려는 성질이 있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인간형을 재발견했고,
동양의 공자(孔子)는 고대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 사회상을 재구성했다.  
  
한국 보수 세력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JP의 인생 역정을 탐색하다 보면
보수를 재생·재현하거나 재발견 혹은 재구성할 풍부한 자원들을 만나게 된다.

흥미롭게도 JP5·16 혁명을 일으킬 때 '진보적'인 '군부 운동권'이었다.
1970~80년대 '학생 운동권'이 꿈꿨던 혁명을 그는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앞세워 결행했다.
미래의 부유한 유토피아를 그리며 과거에 없던 길을 새로 냈다는 점에서 그는 진보주의자였다.

5·16은 이전 정권들의 민주주의로 포장된 부패·무능·혼란을 청산하고
공산화의 위험성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5·16은 당대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박정희김종필 집권 세력은 18년 만에 국가 제도와 시스템을 근대화했고,

명망가 중심의 붕당(朋黨)적 정치권을 대중정당 체제로 변모시켰으며

죽기 살기로 외자를 끌어들여 산업 인프라 구축,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를 성공시켰다.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배고픔에서 해방되었다.


5·16 군사정권에서 JP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삼양 라면이 처음 생산됐다.

70년대 초 정권이 명령하듯 밀어붙여 통일벼 품종이 개발됐다.

JP국가 혁신가였다.

(*일제 해방 뒤 공산주의의 길을 걸은 김일성 정권의 3대 세습자가 2012년 집권 연설에서

"인민에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적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주민은 여전히 배고픈 북한과 비교해 보라.)    
    
JP5·16이 형식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파괴한 쿠데타라는 점을 뼈아프게 여겼다.

"쿠데타, 그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두 번 다시 할 거 아니야"

(1995년 전두환의 신군부를 처벌하는 5·18특별법국회에서 통과시키면서).

그렇다고 5·16의 혁명적 가치가 소멸하지 않는다.

3600명의 반란군이 움직이는데 단 한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혈혁명이었다.

 JP "쿠데타든 혁명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상을 뒤집어 국민이 잘살게 됐으면 그만이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해. 배고픈 나라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어"라고 설파했다.    
    
요새 길 잃은 보수 정치권에서 '신보수''개혁 보수''탈냉전 보수' 같은 말들이 많이 나온다.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 같다.

세상에 감동을 주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묵직한 내용을 깡통에 담고 싶다면 JP를 학습하길 바란다.

김종필은 신보수의 젖줄, 탈냉전 보수의 교과서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필자는『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2016년 출간)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면서

2014년 가을부터 14개월간 그를 100여 차례 인터뷰했다.

JP가 남긴 정치적 자산을 하나씩 따져 본다.


2015년 ‘김종필 증언록’ 연재 당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기자(오른쪽). [중앙포토]

2015년 ‘김종필 증언록’ 연재 당시 김종필 전 총리와 전영기 기자(오른쪽). [중앙포토]


①인간의 향기, 비유와 여백=
그는 유머를 즐겼다.
운명하기 한 달 전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내 입이 밥을 초청하지 않아"라는 농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입맛이 없다는 소리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극한적 순간에도 자신과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사람만 이런 유머를 던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태도가 거의 본질"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품격있는 보수 정치에서 "유머는 거의 본질"에 해당한다.

 JP는 1995년 자신과 김대중세대교체론으로 몰아내려는 정적들을 스스로 번역한 영시 한 수로 응대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세월을 거듭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이상을 잃을 때 비로소 늙게 된다(새뮤얼 울만의 청춘)."

정치는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직업이다.
인간의 향기, 비유와 여백이 있어야 질리지 않는다.

②자유민주주의는 불멸의 가치=
김종필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육군본부 정보국의 북한반장이었다. 그날 새벽 당직 근무를 섰다. 위도 38선 세 곳을 탱크 부대를 앞세워 뚫고 내려온 김일성 공산군의 실체를 확인해 전 군에 비상령을 내렸다. 김종필 중위는 전황 보고를 받는 육군 참모총장이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담배를 든 채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기억했다. 무기 없는 국방, 훈련 없는 군대는 그저 도망치기에 바빴다.

20대 초반 김종필의 육사 8기 동기생은 1200명이었는데 6·25 전투에서만 400명가량 전사했다.
죽은 한국군이 14만명, 유엔군이 6만명,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가 25만명이었다.
이 모두가 김일성이 한국을 공산화하려는 야심 때문에 벌어졌다.
JP와 동시대인이 피로써 지키려 했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였다.
JP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신앙이었다.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③경제력 없으면 껍데기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피가 아니라 빵을 먹고 자란다"는 JP의 지론이다.
그는 가난한 장교 시절 손수 집을 지어 집 장사를 하기도 했고,
정치를 떠나(60년대 후반) 감귤 농장과 젖소 목장을 운영해 돈을 벌기도 했다.
맹자(盟子)의 가르침인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생업이 없으면 마음이 정처 없이 떠돈다)'은
JP가 미리 쓴 묘비명에도 들어있는 말이지만 젊을 때부터 터득한 인간의 본성이요 치국(治國)의 원리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권이고 복지다.
경제력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껍데기 민주주의다. 지속가능성이 없다.  

 
④키신저식 열강주의 외교는 사절=
김종필은 자기보다 세 살 많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싫어했다.
키신저는 1973년 미국과 북베트남(월맹) 간 평화협정을 맺어 남·북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탔다. 그러나 1년 반 만에 남베트남(월남)은 무력으로 공산화됐다.
월맹 공산주의자들이 미국과 월남을 그럴듯한 평화로 속인 것이다.
키신저는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총리와 식사를 하면서 평화협정에 대해 꽤 자랑을 늘어놨는데 박 대통령이 "월남은 당신 때문에 종말이 시작됐다"고 쏴붙였다고 한다.
JP는 "동맹국이라 해도 미국을 무조건 믿지 마라.
키신저같이 자국 이익을 위해 약한 동맹국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경계했다.  

⑤자주적 방어 의지 없으면 미국은 떠난다=
1970년대는 월남, 90년대는 필리핀미국은 스스로 방어 의지가 없는 나라들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 뒤 월남은 망했고 필리핀중국에 영해를 빼앗겼다.
1979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다 실패한 것은
자유·공산 진영 간 세계적 냉전 속에 중화학 공업과 산업화의 나라로 성장한 한국을 버리는 게
미국의 손해라는 자체 평가 때문이었다.
한미동맹의 진실은 한국의 자체 방어 의지, 무력과 경제력이 강할수록 미군이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 상황이 벌어지면 동맹은 언제든지 무력화될 것이다.    
    
⑥좋은 공산주의자도 있다=
JP는 관념보다 힘과 현실을 중시했다.
공산주의자 중에서 중국의 덩샤오핑과 베트남의 호찌민을 존경했다.
그들은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정치력을 집중했다.

덩샤오핑이 1980년대에 추진한 과학·교육 경쟁력 강화 정책, 치열한 국내 권력투쟁을 거쳐 확립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높이 평가했다.

JP는 김일성 3대 세습체제가 공산주의 중에서도 악성인 반인권, 전체주의 사회로 퇴행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만일 김정은이 그런 걱정을 불식하고 인민을 위해 대규모 경제 개발로 방향을 튼다면 JP도 돕자고 할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를 선의로 대하는 것까지 말릴 수 없지만, 환상은 갖지 말라는 게 김종필식 보수의 생각이다.
  
⑦민심은 조련사 물어 죽이는 맹수=
JP민심을 두려워했다. 정권이 좋은 실적을 내도 오만해지는 순간 민심의 바다가 뒤집어 버린다고 했다.
60년대 미국에서 만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은
"맹수는 평소 아무리 조련사가 잘해 줘도 작은 잘못 하나로 바로 물어 버린다.
유권자는 맹수와 같다"고 조언했다.  
     
⑧가슴에 못 박는 원한 정치 하지 말라=
김종필은 김대중이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면서 호남 민심이 폭발할 지경이라는 것을 느꼈다.
1997년 보수주의 원조인 김종필은 같은 보수인 이회창을 버리고 진보 쪽의 김대중 손을 들어 줬다.
그는 자기 집을 찾아온 김대중에게
"호남의 한을 풀어 드리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겠다"며 DJP 후보 단일화에 응했다.
JP는 자신이 국무총리였던 박정희 시대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저지른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이
늘 마음의 부담이었다.     
 
⑨탈냉전·남북평화 하려면 국내 정치 통합부터=
JP한테 한 번은
노태우·김영삼한테 붙고(1990년 3당합당), 다른 한 번은 김대중한테 붙은(1997년 DJP 후보 단일화)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JP의 철학과 셈법은 다르다.

"90년은 세계사적으로 탈냉전이 진행돼 소련 해체, 동구 공산주의 붕괴가 진행되던 시기다.
여야, 보수·진보가 힘을 합쳐 압도적으로 정부의 북방외교를 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3당 합당을 했다.
정치권의 일치단결에 힘입어 한·소(90년) 및 한·중(92년) 수교가 가능했다."
 
JP가 97년 DJP 공동정권을 준비하면서 했던 말도
"통일 시대를 대비하려면 국내 정치통합이 먼저다.
산업화 민주화 세력, 김종필과 김대중 세력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JP의 국내 통합, 정치권 일치론은
현재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북한 비핵화 국면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⑩맨몸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다=
김종필이 숨질 때까지 미워했던 사람은 전두환이다.
전두환은 1980년 집권 과정에서 JP를 수백억 원대 부정축재자로 몰아 서빙고 보안사에 구금시켰다.

JP의 장례 과정에서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김종필의 재산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 대지 200평짜리 자택이 전부였다.
남은 이들은 고향 부여에 묻힌 JP 부부의 가족묘 관리 비용을 걱정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십년간 주장했던 수백억 원, 혹은 수천억 원대의 재산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이 국고에 강제로 환수시킨 재산은
JP가 오래전 '운정재단'이라는 비영리 장학자금에 기증한 제주 농장, 서산 목장이었다.
농장과 목장은 전두환의 환수가 없었더라도 이미 JP가 손댈 수 없는 물건이었다.
JP는 5·16을 쿠데타라고 부르는 사람보다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둔갑시킨 전두환을 더 미워했다.
사석에서 "미운 놈 먼저 죽는 걸 봐야 할 텐데"라는 농담도 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 JP, 삼양라면 첫 도입…먹고 사는 문제가 인권이고 복지

 

3[사설] 한국 정치사의 명암, 김종필 떠나다

조선일보
             
입력 2018.06.25 03:20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가 23일 92년간의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던 '3김(三金·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은 고인의 빈소에 조화를 보냈고,

청와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 남긴 고인의 손때와 족적은 쉬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고인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애도했다.

정부는 민간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추서하기로 했다.


김 전 총리의 삶은 말 그대로 영욕(榮辱)과 명암이 엇갈렸다.


1961년 박정희 장군과 함께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4·19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것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그러나 그 뒤 박 전 대통령과 함께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산업화의 길로 이끌고

현대 국가 체계를 만드는 과정에 그의 공(功)이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하겠다"며 추진했던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해 받은 배상금은

포항제철경부고속도로, 한강 유역 다목적댐 등에 쓰이며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18년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로 지적되는 국민 인권의 후퇴에 그의 책임이 없다 하기 어렵다.

그는 이 기간에 많은 재산을 모아 '부정 축재자'로 처벌받기도 했다.

고인은 정치인으로서도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정권을 만든 데 이어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정부 탄생에 한 축을 담당했다.

야합(野合)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군사정부가 문민정부로 순탄하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 기여를

가벼이 볼 수만은 없다.

1997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호남과 진보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산업화, 문민화, 민주화 과정에 모두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다.


이런 그에 대해 '평생 2인자에 만족하며 권력과 양지만 따라다녔다'는 평가가 있고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양극단으로 갈라져 극한투쟁이 계속된 대한민국 정치판 속에서

순리(順理)를 생각하며 파국을 피하려 했던 점을 평가하는 이도 많다.

군인 출신이었지만 문학과 예술, 철학을 사랑했던 그는

특유의 유머와 '촌철살인'으로 우리 정치에 멋과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줬다.

그는 관용과 타협의 정치를 꿈꾸며 내각제를 평생 목표로 추진했지만

결국 그 바람을 이루지 못하고 잠들게 됐다.

김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3김 정치'는 물리적으로 그 수명을 다했다.

이 나라를 선진국 문턱에 끌어올리고 민주주의를 이 땅에 자리 잡게 하는 데에 이들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산업화·민주화 세력이 충돌하는 와중에

그 어느 한편에 서서 투쟁을 이끌던 3김식 리더십으로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도전에 맞설 수 없다.


앞서 두 김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총리까지 보내면서 이들의 유산도 함께 떠나보내고

새 시대를 담아낼 정치를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4/2018062403007.html


신창섭(schan****)2018.06.2513:26:14신고
박정희도 , 김영삼도, 김대중도, 그리고 오늘날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을 오게한 것도,
다 김종필이 만들어 놓은 무대위에 펼쳐진 것이다,
더욱이 진보정권을 만들어 지금 세상을 오게 한 장본인도 김종필이란 말에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의 물줄기를 이리 저리 틀어 대한민국을 40년동안 이정도로 변모 시키는데
JP 만큼 족적을 남긴 사람은 없다.
아마도 이런 인물이 두번다시 세상에 나온다는 것은 힘들 것으로 생각되나,
다시한번 썩어빠진 이 나라를 구할 제2의 JP 출현을 희미하게 나마 두손모아 고대 해보자...
안현진(rnfma****)2018.06.2513:08:23신고
오로지 정권차지에 혈안이 되어 학생들까지 동원 허구한 날 데모만 일삼던 YS DJ와의 야합만 없었어도 주사파와 하부조직인 노조가 헌법을 위반 조직적으로 정권을 강탈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박대봉(seri****)2018.06.2512:46:01신고
김종필이 대통령하기로 작정했다면 10.26 이후 나서서 최규하 대신 그 자리를 꿰어찰 수 있었겠지.
그때 적극적인 역할을 해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출현을 막고 한국도 내각제로 이행했어야 했다.
고삐 풀린 신군부의 정권찬탈과 광주학살이 이어지며 한국의 정치는 더더욱 꼬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조기택(sisaf****)2018.06.2510:59:38신고
3김 중에 애국심이 투철한 분이다.
다른 김은 3당 합당 야합으로,
하나는 JP에 내각제 약속하고 사기친 김이고, 북한에 핵개발 하게 하고 노벨상 받고,
그러고 보면 정치 꼼수를 부려 대통령 된 인간들이네,
신영규(syk****)2018.06.2510:49:45신고
김종필 씨는 평생 내각제를 주장했다.
왜 그랬냐면 대통령 직선제를 하게 되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이 제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각제를 주장했다. 결국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그랬다.
그러나 내각제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4/2018062403007.html        

            

2두달전 마지막 인터뷰서 “지도자는 욕먹을 각오해야”

최우열 기자 , 박효목 기자 입력 2018-06-25 03:00수정 2018-06-25 04:07  (동아일보)



[김종필 1926~2018]마지막까지 정치적 메시지

박영옥 여사 영정 앞의 JP… 국립묘지 마다하고 “아내 옆에 묻히겠다”

2015년 2월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부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3년 4개월 뒤 같은 장례식장 30호실에 김 전 총리의 빈소가 차려졌다.

국립현충원을 마다하고 충남 부여군 가족묘원의 부인 옆에 나란히 안장될 예정이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4월 하순 서울 서초구 반포한강시민공원 내 세빛섬의 이탈리아 레스토랑.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오랜만에 측근인 이양희 전 자유민주연합 의원 등을 만나 식사를 했다.
오랜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던 JP는 마늘빵을 다 비우고
“빵이 참 맛있다. 좀 싸줄 수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이 전 의원은 “기력이 많이 떨어져 왼손으로도 밥을 먹기 힘들어했지만 나라 걱정하는 말씀은 여전했다”고
전했다. JP는 2008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른손을 잘 쓰지 못했다.
한 측근은 “한강에서의 식사가 사실상 제대로 된 마지막 식사였고
곧 말을 못할 정도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고 말했다.

○ 5월 들어 건강 급속 악화 

40여 년 JP를 보좌해 온 김상윤 특보의 손발이 5월 들어 바빠졌다.
JP의 건강 상태를 묻는 측근들의 전화도 잦아졌고 병원을 오가는 일도 많아졌다.
JP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보름 동안 입원 치료를 받은 뒤 7일 퇴원해 자택으로 돌아갔다.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한 것이 아닌 사실상의 ‘마지막 귀가’였던 셈이다.

김 특보에게 “JP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자유한국당 정우택 의원
22일 급하게 서울 중구 청구동 자택을 방문했다.
정 의원은 “의식은 있었는데 ‘정우택이 왔습니다’라고 외치니 눈을 반쯤 뜨시고 살짝 손가락을 까딱 하셨다. 그 외엔 다른 대화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측근은 “연명을 하려면 목에 관을 삽입해서 음식물을 주사해야 하는데
가족이나 본인도 그런 식의 연명치료는 원하지 않았다.
퇴원 후 한 번 병원에 다녀온 뒤 대부분 자택에서 쉬셨다”고 전했다.

23일 아침 JP는 장녀 예리 씨(66)와 아들 진 씨(57)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 JP의 마지막 메시지 “지도자는 욕먹을 각오해야”

앞서 4월 18일 JP는 청구동 자택에서 지방선거 등 정치현안에 대해 동아일보와 인터뷰(4월 23일자)를 했다. 생전 언론과의 마지막 공식 인터뷰였다.
JP는 여전히 국내외 정치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총기는 여전했다.
그가 전하려던 핵심 키워드는 북한과 경제.

JP는 “북한을 포기하는 척은 해도 결코 포기할 리 없다.
정부가 북한의 이런 의도를 알면서도 미국을 끌어들이고
평화협정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과정에 들러리나 서지 않을지 걱정이다”라고 했다.
북한이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할 것인데 여기에 넘어가선 안 된다.
김정은이 속으로 우리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경제에 대해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해서 (한국 경제가) 여기까지 왔는데 앞날이 어둡다.
이 상태가 오래갈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러면서 “지도자는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며 정부가 포퓰리즘 정책에 빠져들 것을 미리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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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는 스스로 거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전·현직 의원들을 만나 소통하며 통합과 화합을 강조했다. 정우택 의원은 “3월에 JP와 식사를 같이했는데,
툭툭 던지듯 ‘정치가 이래선 안 된다, 한국당이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된다’고 걱정하셨다”고 전했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선 보수정당의 분열을 상당히 비판했고
보수정당, 나아가 여야 정치의 화합, 통합을 자주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JP의 정치 문하생으로 상주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당 정진석 의원
“문상객을 보니까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모셨던 분들이 JP의 별세에 더 마음을 쓰는 것 같다.
한국 현대사에서 첫 수평적 정권 교체 때의 JP의 역할과 기여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양희 전 의원
민주화의 완성은 ‘양김’만이 한 것이 아니라 ‘3김’이 한 것이다.
JP는 사실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한 게 아니라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가는 길목에서 DJ의 집권은 필연이고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강조했다.

○ 부인과 같은 빈소, 같은 땅에서 영면 

2015년 별세한 부인 박영옥 여사의 3주기를 즈음한 올해 2월,
JP는 건강을 우려하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부인의 산소에 올라가 한동안 있다가 내려왔다.
당시 옆에 있던 한 측근은 “산에 올라갈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었는데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부인을 보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JP의 빈소 역시 박 여사가 2015년 별세했을 때 조문객을 맞이했던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이다.

JP 본인의 뜻대로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지며 충남 부여군 선산의 부인 옆에 묻힌다.
JP는 회고록에 “국무총리를 두 번 했다고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내 고향 부여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미 유택을 마련해 두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누워있는 양지바른 그곳에 함께 누울 생각이다”라고 썼다.

최우열 dnsp@donga.com·박효목 기자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80625/90739938/1#replyLayer#csidxf06de673f1610eeb4b7977d8b50fe38

"나이 90에 이룬 것 없음에 한숨 짓는다"

부인 세상 떠난 뒤 묘비명 써놨던 JP

             
입력 2018.06.23 16:41 | 수정 2018.06.23 16:42

김종필 전 총리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을 미리 써뒀다.
김 전 총리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인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은 23일 본지 통화에서
부인 박영옥 여사가 돌아가신 뒤 김 전 총리께서 미리 묘비명을 써놨다”며
여사와 나란히 안장될 김 전 총리의 묘비명은 고인이 남긴 글귀 그대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지난 2015년 부인 박영옥 전 여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남강호 기자


부인 박영옥 여사가 지난 2015년 숨을 거둔 직후 써뒀던 묘비명은 총 121자다.
김 전 총리는 묘비명에서
“한 점 허물없는 생각(思無邪)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에 박고 몸바쳤다”고 했다.

김 전 총리는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라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묘비명을 끝마쳤다.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한 김 전 총리는 이와 같은 묘비명이 세워질 충남 부여 선산 가족묘에 안장될 전망이다. 평소 부인인 박 여사와의 금실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던 김 전 총리는

부인의 옆에 마련될 자신의 묘 자리도 돌아봤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5년 박 여사의 빈소에서 조문객들과 만나

“난 마누라하고 같은 자리에 누워야겠다 싶어서 국립묘지 선택은 안했다”며

“(장지에) 거기 나하고 같이 나란히 눕게 될 거다.

먼저 저 사람이 가고 (나는) 그다음에 언제 갈지…외로워서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당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은 김 전 총리가 작성했던 묘비명의 전문.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笑而不答」하던 者-
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銘 雲庭 自僎
書 靑菴 高崗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3/2018062301223.html


박성훈(bu****)2018.06.2416:29:40신고
누구의 삶에도 부침이 있고 공과가 있거늘...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 그 중심을 관통한 사람의 삶이랴! 아름다운 묘비명을 쓰고 가신 님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조성남(nancy****)2018.06.2415:02:38신고
DJP 야합으로 인하여 JP는 한국의 현대사를 좌회전으로 돌리게 한 장본이다. 별로 추모하고 싶지않다. 자기 삶을 다 살다간 사람을... 왜 애도하고 추모해야 하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3/20180623012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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