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11) 김영삼(1927~2015) (조선일보)

colorprom 2018. 1. 27. 15:49

[Why] 그에게 묻고 싶었다, 아드님이 먹은 건 먹은 것 아닙니까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 2018.01.27 03:02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11) 김영삼(1927~2015)

중학생 때 책상머리에 대통령 되겠다고 써놓고는 당당히 청와대 입성한 그
임기말 둘이 점심 먹는데 식탁에 앉자마자 말했다 난 한푼 받은 적 없어요
두 전직 대통령 구속하고 DJ에게 길을 열어준 그는 큰 돌산 같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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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가도 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그림에 능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김영삼이라는 사람은 정치인으로 태어났고 정치인으로 살다가 정치인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학생 때 책상머리에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써놓고 날마다 바라봤다니 여느 아이와는 달랐다.

김영삼은 정치적 본능이 뛰어난 사나이였다.
인사동에 있던 신민당사가 경찰 습격을 받게 된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
어느 방향으로 도망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정확하게 알았다.
감각이 둔한 사람은 경찰이 달려드는 방향으로 가다가 붙잡혀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는데
그런 면에서 김영삼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학문적 깊이는 없었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만 알면 되지 모든 분야에 능통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한동안 그를 보좌했고 그가 대통령이 된 뒤 통일부 장관을 지낸 한모 교수가 나더러 이런 말을 했다.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은 '덕장'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입니다."
어떤 정치인은 돈이 생기면 자기가 세어보고 금고에 넣는 것이 관례였다는데
김영삼은 돈이 생기면 대개 주변 사람들에게 맡겨 처리했다고 한다.
스물다섯 살에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영삼은 정치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가 한때 대통령이 될 꿈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나와 단둘이 점심을 먹으며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김 교수, 나도 마음을 비웠어요.
김 교수처럼 젊은 후배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다 그렇게 끝내는 생이 됐으면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하도 감동스러워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나 그의 손을 잡고 "훌륭한 결단입니다"라고 말했다.
내 기억에 그 말을 하던 때는 그의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던 때였다.

그러나 1년 사이 김영삼이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때가 왔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은 내게만 털어놓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기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기자들이 김영삼에게 물었다. "마음을 비웠다고 하셨는데 왜 다시 대통령 출마를 꿈꾸고 계십니까."
김영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마음을 비웠다고 한 것은 앞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고
만약 그런 기회가 와서 대통령이 되면 빈 마음을 가지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는 뜻이었소."
누구도 무슨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야당을 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영삼김종필과 함께 노태우가 운영하는 민주정의당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김종필은 정권 장악 기회가 자기에게 오리라는 것을 생각조차 안 했겠지만
김영삼은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김대중만 야당에 혼자 내버려두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두 사람이 3당 통합의 '위업'을 성취했다고나 할까.

정주영이 대선 때가 가까워져 민정당 당사로 김영삼을 찾아가
"김 총재, 군인들이 당신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줄 것 같소?"라고 묻자
김영삼이 대답했다. "틀림없이 내가 얻어냅니다."
반신반의하던 정주영이 말했다.
"내 생각에는 당신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주지 않을 것 같소.
안 되면 내가 당을 만들 텐데 이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세요."
김영삼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틀림없이 대통령 후보 공천을 받습니다.
그렇게 안 되면 노태우의 목덜미를 물고 끝까지 늘어질 것입니다.
정 회장은 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세요."
더 할 말이 없어서 정주영은 그 자리를 물러났다.

어쩌다 정주영은 당을 하나 만들었는데 자신이 그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김영삼 눈에는 배신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가혹할 만큼 정주영이 하던 일을 탄압했다.
정주영은 권력 밖에 난 서러움을 처음 맛보고 통곡했을 것이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김영삼은 나를 청와대 점심에 초청했다.
청와대 테이블이 하도 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그의 첫 마디가 "김 교수, 대통령이 돼 나는 남의 동전 한 푼 받은 적 없습니다."
사실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옛 동지로서 문안하는 말이 한마디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때 칼국수를 먹고 있었는데 '아드님이 먹은 것은 먹은 것 아닙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목에 칼국수가 걸려 있어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김영삼은 적어도 내게는 의리 있고 신의를 지키는 정치인이었다.
타고난 본능으로 정계를 휘어잡은 김영삼이었지만
어쩌다 그에게 대통령 될 길을 열어준 전두환노태우를 구속하고
그들을 법정에 세워 모욕을 당하게 했을까.

그의 인간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그가 은혜를 모르는 후안무치한 한 시대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두 전직 대통령을 국민 앞에 부끄럽게 만든 사연을 피상적으로만 관찰하지 않는다.
그는 민주화 투사로서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다'라는 군 지도부의 의견에 크게 반발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군인 정치는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야당에 홀로 남았던 김대중에게 대통령의 길을 열어줬다.
과연 '거산'이라는 아호에 어울리는 큰 돌산 같은 인물이었다.
한국에 태어난 5000만 동포 가운데 중학생 때 이미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 맹세하고
악전고투 끝에 당당히 청와대 주인으로 입성한 유일한 인물이 대통령 김영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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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6/20180126015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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