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0.28 03:04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장쩌민을 내정한 날은 1989년 5월 19일이었다.
톈안먼(天安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계엄 실시 하루 전이었다.
덩은 공산당이 다시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면 톈안먼 진압과 무관한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상하이시를 이끌던 63세의 장쩌민은 상하이 학생 시위를 단호하고도 요령 있게 잠재워
덩의 신임을 얻었다.
5월 31일 장쩌민은 즉각 상경하라는 명령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베이징으로 향했다.
6월 1일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만나 "공산당 총서기로 임명됐다"고 통보했다.
6월 4일 톈안먼 사태가 터졌다.
1992년 1월 88세의 덩샤오핑은 선전과 광저우 등 남부 도시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떠났다.
1992년 1월 88세의 덩샤오핑은 선전과 광저우 등 남부 도시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떠났다.
톈안먼 사태 이후 꺼져가는 개혁·개방의 불꽃을 다시 지피기 위해서였다.
덩은 1월 20일 선전 무역센터에서
"관건은 사람이다. 지금 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다.
60대는 젊은 축에 속한다. 20년 후면 80세를 넘는다. 더 젊은 동지를 발탁해야 한다"고 했다.
그해 10월 열린 14차 공산당 대회에서 장쩌민 후계자로 덩이 점찍은 사람이 50세의 후진타오였다.
덩은 '칭화대 수재'로만 알았던 후진타오가 티베트에서 독립 요구를 총칼로 누른 것을 눈여겨봤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은 모두 절대 권력자가 정해준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두 사람은 한계를 넘지 않았다.
시진핑은 다르다.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 그가 후계자 반열에 오른 건
시진핑은 다르다.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 그가 후계자 반열에 오른 건
장쩌민계와 후진타오계, 태자당(혁명 원로 자제)이 정치적으로 타협한 결과다.
각 계파는 시진핑을 외모처럼 둥글둥글하고 원만한 사람이라고 봤다.
그러나 시진핑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을 반대한 태자당 선배 보시라이,
공안·정보를 장악한 장쩌민계의 저우융캉, 후진타오 비서실장을 지낸 링지화를
'반(反)부패' 이름으로 숙청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가르침대로 군부를 '시자쥔(習家軍·시진핑 군단)'으로 채웠다.
이번 당 대회에선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권력을 호락호락 내놓지는 않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