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놀이터에 시소가 있더군요.
거기서 문득 예수님의 '반이원론'을 봤습니다.
레너드 스윗(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박사는
"예수님 말씀은 철저히 반(反)이원론적"이라고 했습니다.
<본지 5월 31일자 18면>
예수님은 "나는 가장 큰 자요, 가장 작은 자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했습니다.
그럼 '반이원론적'인 게 뭘까요.
시소는 혼자서 탈 수 없죠.
양끝에 사람이 앉아야만 움직이죠. '쿵~덕, 쿵~덕.'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죠.
이쪽 때문에 저쪽이 존재하고, 저쪽 때문에 이쪽이 존재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이쪽일까요, 저쪽일까요.
그렇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소, 그 자체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말씀을 시소에 대입하면 답이 나오겠죠.
마태복음 10장34절에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시소의 양끝에 '평화'와 '칼'이 놓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죠. 평화와 칼, 정말 물과 기름이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소 위에선 달라집니다.
높음과 낮음이 하나이듯, 시작(알파)과 끝(오메가)이 하나이듯, 평화와 칼도 하나가 되는 거죠.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복음 10장35~36절)"고 말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지적이죠.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족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야." 그러나 그 속을 헤쳐보면 딴판이죠.
온갖 집착과 바람, 애절함과 원망, 사랑과 증오의 비빔밥이 또 '가족'이거든요. 열에 여덟, 아홉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게 또 '가족'입니다. 그 강고한 '집착의 끈'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칼'을 꺼내신 게 아닐까요. 평화를 주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려면 우선 '가족'이란 가면을 벗겨야 합니다. 그리고 집착의 실체를 봐야 합니다.
그럼 알게 되죠. '가족이 나의 원수구나',
다시 말하면 '가족에 대한 집착이 나의 원수구나',
또 다시 말하면 '가족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나의 원수구나'를 깨닫게 되죠.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는 예수님 말씀처럼 말이죠.
그 집착의 끈을 향해 '칼'을 내려치세요. 회개가 칼입니다.
그걸 끊는 순간, 평화가 쏟아집니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이 쏟아집니다.
그 순간, 원수를 사랑하게 되죠.
집착과 바람을 뒤에 감춘 '나의 사랑'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화보다 칼을 먼저 주신 게 아닐까 싶네요.
칼을 통해서 평화가 옴을 알기에 말이죠.
시소의 양끝은 하나입니다.
칼이 평화이고, 평화가 칼이죠.
그래서 '칼을 통하지 않은 평화'가 진짜 평화인지, '집착을 끊지 않은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돌아봐야죠.
낮음을 통하지 않은 높음, 비둘기(순박함)를 통하지 않은 지혜, 그것이 참인지 늘 짚어봐야겠죠.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