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수업 시간에도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애~애~앵!’
초등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교실을 뛰쳐나갔습니다.
복도와 계단을 달려서 운동장 귀퉁이에 줄지어 쪼그려 앉았습니다.
양손으로 두 귀와 두 눈을 막고 입을 벌렸습니다.
적기의 폭격 때는 그렇게 해야 고막이 터지는 걸 막는다고 했습니다.
앞줄, 옆줄 반듯하게 앉아야 했습니다.
약간만 튀어나와도 스피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3학년2반 앞에서 일곱째 줄 똑바로 앉아!”
철 좀 드니까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게 냉전체제, 군사정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철 좀 드니까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게 냉전체제, 군사정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냉소적입니다. ‘재난 대비’ ‘비상 훈련’이란 말을 들으면 콧방귀부터 나옵니다.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비상 훈련 매뉴얼=귀찮고, 형식적이고, 거추장스럽다’는 강한 선입관이 생겼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랬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랬습니다.
비행기 승무원이 앞에서 구명조끼에 바람 넣는 법을 설명합니다. 늘 한눈을 팔았습니다.
동작과 순서를 제대로 따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비상구 앞에 앉을 때면 널찍한 자리만 좋아했습니다.
승무원이 설명하는 비상시 행동 요령은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영화관에서도 그랬습니다.
화재 발생 시 비상구 통로가 스크린에 그려집니다. 저는 하품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광고가 많지?” 투덜거렸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다들 말합니다. “어른들 말을 들은 학생은 죽고, 듣지 않은 학생은 살아남았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 말을 듣는다고 다 죽는 건 아닐 텐데. 어른도 어른 나름이겠지.
그럼 대체 어떤 어른을 말하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게 저 같은 어른이더군요.
형식적인 매뉴얼을 만드는 어른, 거기에 코웃음 치는 어른, 그래서 매뉴얼을 무시하는 어른.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도 배가 뒤집어졌을 때 매뉴얼을 외면했습니다.
해경도 그랬습니다. 수색구조 매뉴얼을 무시했습니다.
‘사고 발생 시 선박을 잘 아는 사람을 현장에 급파하라’는 수칙을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누구보다 배를 잘 아는 선원들을 뭍으로 먼저 옮겼습니다.
신원 파악을 먼저 하라는 매뉴얼도 놓쳤습니다.
해경은 배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선원들을 다시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어른들은 매뉴얼을 뭉갰습니다.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배가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선실에 대기하라”는 방송을 침착하게 따랐습니다.
베이징 특파원이 그러더군요. ‘세월호 참사’ 이후 중국 교육계가 한국 교육을 연구하고 있답니다.
배가 침몰하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선내 방송대로 실내에 머물러 있었느냐는 겁니다.
중국 학생들이라면 유리창 깨고 다들 바다로 뛰어들었을 거랍니다.
짚어 봅니다. 중국 학생들은 왜 바다로 뛰어들까. 그 사회의 매뉴얼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저희 세대도 그랬을 겁니다. 유리창을 깨고 바다로 뛰어들었을지 모릅니다.
저희는 매뉴얼을 믿지 않는 세대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다르더군요. 그들은 매뉴얼을 믿었습니다.
어른들이 만들고도 어른들이 믿지 못하는 매뉴얼을 아이들은 믿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죄스럽습니다. 이토록 큰 참사를 당하고서야 깨닫습니다.
생각할수록 죄스럽습니다. 이토록 큰 참사를 당하고서야 깨닫습니다.
매뉴얼도 ‘그 시대의 초상(肖像)’이더군요.
권위주의 시대의 매뉴얼은 권위적이었습니다.
그게 싫었던 저는 ‘이 시대의 매뉴얼’까지 무시했습니다.
저는 뉘우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두 번 다시 매뉴얼을 무시하지 말자.
실질적인 매뉴얼, 그래서 존중받는 매뉴얼.
“이걸 따라가야 우리가 살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매뉴얼.
그걸 꾸려서 나 같은 어른부터 지키자고 다짐합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