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1 : 절집의 ‘용맹정진’을 아시나요?
하안거나 동안거 때 1주일간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티며 좌선을 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쏟아지는 잠을 쫓느라 온갖 풍경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는 한겨울 눈밭에 나가서 뒹굴기도 합니다. 잠을 깨느라 말이죠.
또 어떤 이는 이마 밑에 기다란 꼬챙이를 꽂아놓기도 합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부딪힐 때 정신을 차리라고 말이죠.
그렇게 ‘용맹정진’을 통과하면 사람들은 뿌듯해 합니다.
마치 해병대의 1주일 지옥훈련을 통과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용맹정진’을 철마다 한다는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참 애매합니다.
저마다 “어떻게 졸음을 이겼는가?” “어떻게 잠을 안 자고 버텼는가?” 등 무용담처럼 늘어놓죠.
반면 수행의 진척을 말하는 사람을 만나긴 참 어렵습니다.
“수행에 대한 속살림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궁금하더군요. 진짜 ‘용맹정진’이 무엇인지 말이죠.
# 풍경 2 : 화엄경 현수품의 한 대목입니다.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용맹(勇猛)이라/
이 빛이 게으른 자를 깨우쳐서/
저로 하여금 삼보 중에 공경하고 공양하여/피로하고 싫어함이 없게 하느니라.”
그렇군요. ‘용맹’은 게으름 없이, 쉼 없이, 공(空)에다 놓고 놓으며(공경하고 공양하며) 가라는 말이군요.
그럴 때 용맹에는 피로함도, 싫어함도 없다는 거죠.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를 위해 밤을 샐 때 피로한가요? 싫증이 나나요?
그렇지 않죠. 오히려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게 되죠. 그게 바로 ‘용맹’입니다.
거기에는 피로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죠.
그런데 사람들은 “용맹!”하고 힘을 줍니다.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죠.
그리고 거대한 철벽을 뚫어야 할 사람처럼, 생사의 결전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긴장하죠.
결국 마음에 힘이 들어가고 맙니다. 굳고, 뻣뻣하고, 유연성을 잃게 되죠.
사생결단, 한판 싸움, 용맹이란 이름에 마음이 ‘착!’하고 달라붙고 마는 겁니다. 머물고 마는 거죠.
그렇게 마음이 머물면 알을 품기가 어렵습니다. 화두를 품기가 어렵다는 말이죠.
설사 화두를 품는다 해도 부화가 안 되죠.
왜냐고요? 알을 품을 때는 적정한 온도와 적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화두도 마찬가지죠. 어미 닭이 알을 품을 때 어떤 마음으로 품을까요?
“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알을 부화시키고 말 거야”라며
목에 힘을 주고, 다리에 힘을 주고, 가슴에 힘을 주고 알을 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런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알을 품죠.
그럴 때 품 안에서 온기가 올라옵니다.
왜냐고요? 편안한 마음, 즉 머무는바 없는 곳에서 ‘부화의 에너지’가 올라오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용맹정진의 ‘용맹’을 오해합니다.
인상 쓰고, 잠 안 자고, ‘악!’ 하는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을 태우고, 죽기살기로 덤비는 것이
용맹정진이라 여기죠. 그렇지 않습니다.
“왜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닌가?”
“왜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본다고 했나?”
“왜 1시간 전에 짜증을 냈는데, 지금도 마음이 찝찝한가? 짜증의 순간은 이미 없어졌는데….”
“왜 봄이 간 자리에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간 자리에 가을이 오는가?” 등
나와 세상, 우주에 대한 소소한 물음의 끈을 따라서 내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편안하게, 차분하게, 끊김 없이 그 물음을 좇아서 내려갈 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의 알’을 품게 되죠.
살아 숨 쉬는 화두를 품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용맹정진이죠.
2500년 전, 붓다도 그랬습니다.
2500년 전, 붓다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루에 곡식 한 톨만 먹으며 고행을 하기도 했죠.
배에 손을 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에 손을 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고 합니다.
결국 목숨을 잃기 직전에 고행을 중지했죠.
그리고 한 여인이 공양한 우유죽을 먹습니다. 함께 고행하던 동료는 그를 “배신자!”라고 불렀죠.
그러나 죽을 먹고 기운을 차린 붓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습니다.
그게 무슨 마음일까요? 편안한 마음, 자연스런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죠.
그게 무슨 마음일까요? 편안한 마음, 자연스런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죠.
그 마음으로 붓다는 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별을 바라볼 때 품던 알이 부화했죠. 깨달음을 이룬 겁니다.
붓다는 이미 보여줬죠. 어떤 온도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알을 품을 건가.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