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묻습니다. “크리스천이세요, 아니세요?” 혹은 “불자(佛者)세요, 아니세요?”라고 말이죠.
짧고 가벼운 물음이죠. 그러나 그 안에는 종종 ‘칼날’이 숨겨져 있습니다.
상대의 삶과 지향을 이해하고자 던진 물음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답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으로 ‘쩍!’ 갈라지고 말죠.
그런데 예수님은 “크리스천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죠.
부처님도 마찬가지죠. “부디스트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부처님도 “‘나’를 비워서 부처(Budda)의 자리에 들라”고 했습니다.
왜냐고요? ‘간격’ 때문이죠. 나와 예수님, 나와 부처님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하니까요.
‘크라이스트(Christ)’와 ‘크리스천(Christian)’, ‘붓다(Budda)’와 ‘부디스트(Buddist)’,
그 사이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강물이 흐르니까요.
어떤 이의 강폭은 ‘태평양’보다 넓고, 어떤 이의 강폭은 동네 개울보다 좁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는 일은 ‘해바라기’가 아닙니다.
몸을 땅에 박은 채 평생 하늘만 쳐다보는 방식은 아닙니다.
강의 이쪽에 서서 평생 저쪽만 바라보는 식은 아니라는 거죠.
왜냐고요? 강을 건너지 못하면 살아있는 부처, 숨 쉬는 예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해바라기는 어찌해야 할까요. 땅에 박힌 뿌리를 뽑고서 태양을 향해 날아가야 할까요?.
그럼 10분도 못 가 말라죽고 말겠죠. 그럼 어찌할까요.
어찌해야 태양 안에 해바라기가 거하고, 해바라기 안에 태양이 거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나’를 열어야죠. 그런데 “열려라, 참깨!”한다고 열리는 게 ‘나’가 아니죠.
‘나’를 여는 일은 강고하기 짝이 없는 ‘에고’를 여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에고’를 찾아야 합니다. ‘열지 못하는 나’를 찾아야죠.
그리고 회개를 해야죠. ‘열지 않으려는 나’를 찾아 참회를 해야죠.
그리고 끝내 ‘열게 해주는 신(예수 혹은 부처)’에 대해 감사해야죠.
이 모두가 가슴의 밑바닥, 에고를 뽑은 자리에서 절절하게 올라와야죠.
해바라기는 그제야 자신을 열 수 있죠.
그렇게 열린 통로로 태양의 빛과 에너지가 들어오죠. 열린 만큼 들어오고, 들어온 만큼 차는 거죠.
그렇게 차고, 차고, 또 차서 해바라기는 빛과 에너지로만 차게 됩니다. 그때는 간격이 없어지죠.
해바라기가 태양이 되고, 태양이 해바라기가 되니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거하는 거죠.
그러니 묻지 마세요.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불자냐, 아니냐.”
밖을 향해 묻지 마세요. 안을 향해 물으세요. 자신을 향해 물으세요.
‘나는 그리스도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붓다에게 다가서고 있는가’,
‘한 발짝씩 내딛은 만큼 실제로 가고 있는가’라고 말이죠.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