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1 : 불교에는 ‘삼신불(三身佛)’이 있습니다.
법신불(法身佛)과 화신불(化身佛), 그리고 보신불(報身佛)입니다.
우리들은 이 ‘삼신’을 밖에서 찾습니다. 삼신을 향해 절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달리 말했습니다.
“밖으로 삼신여래를 찾는다면 자기 안의 삼신불을 볼 수 없다.
이 삼신불은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요?
#풍경2 : 기독교에는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죠.
하느님(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거죠.
얼마 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작은 논쟁을 봤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믿을 수가 없다.
그건 교회의 조직화와 권력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그러자 반박이 나왔죠.
“그건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다. 삼위일체 없이 어떻게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겠나.”
그곳에서 삼위일체는 “믿을 건가, 믿지 않을 건가”의 대상으로 보이더군요. 과연 그럴까요?
#풍경3 :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천(天)·지(地)·인(人) 사상이 있었죠.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단군시대부터 내려온다는 『천부경』에도 천지인 합일사상이 깔려 있죠.
고구려 삼족오(三足烏·발이 셋 달린 까마귀)의 발이 셋인 까닭도 ‘천지인’이 한 몸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태극기에도 천지인 사상은 담겨 있죠.
둥근 원과 붉음(양)과 푸름(음), 이 셋이 한 몸으로 존재하죠.
이처럼 종교에서 하나와 셋, 셋과 하나는 아주 중요한 코드입니다.
기억나세요? 어릴 적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늘 “삼 세 번”이라고 하잖아요.
무슨 내기를 할 때도 “삼 세 판”이라고 하죠.
왜 그럴까요? 그래야 마무리가 되고, 완성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럼 종교에선 왜 ‘하나와 셋’을 강조할까요? 그 역시 마무리를 위한 거고, 완성을 위한 겁니다.
혜능 대사는 “삼신불을 밖에서 찾지 마라. 삼신불은 내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신불이 뭔가요?
청정 법신불(청정한 본래 자리)-
천백억 화신불(법신이 생각이나 마음·물질 등으로 화한 것)-
원만 보신불(화신이 원만하고 조화롭게 돌아가는 것)이죠.
그걸 왜 내 안에서 찾을까요? 맞습니다. 그게 내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 맞아. 점심을 안 먹었군. 배가 고프네”란 생각이 올라오죠.
그때 청정한 법신(생각 이전)이 “배가 고프다”란 화신(생각)으로 화하는 겁니다.
그 순간 법신불이 화신불이 된 거죠. 그래서 가방에 있던 과일을 꺼내죠.
“배 고픈데 혼자 먹을까?”하다가 주위의 배고픈 동료를 보고 나눠 먹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원만하고, 가장 조화롭게, 모두에게 득이 되게 화신불을 운용하는 거죠.
그게 바로 원만 보신불입니다.
나뿐만 아닙니다. 이 거대한 우주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죠.
하늘(법신)에서 별(화신)이 태어나고, 그 별들이 서로 조화롭게(보신) 궤도를 그리며 돌아가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창조주께서 말씀으로 별을 창조하시고, 그 조화로운 모습과 운용을 보며 “보기에 좋군!”하시는 겁니다.
그럼 삼위일체를 다시 보세요. 그건 “믿을 건가, 말 건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치를 말한 거니까요.
그러니 삼위일체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란 깊디깊은 이해의 문제입니다.
결국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죠.
결국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죠.
그런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죠.
‘자아’라는 이름으로 붙들고 있는 나의 고집과 나의 착각, 나의 죄의식이
셋이 하나가 되는 걸 막고 있죠.
그래서 각 종교마다 삼위일체, 삼신불, 천지인을 목이 메도록 강조하는 겁니다.
셋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내 안에도 ‘생명’이 흐르기 때문이죠.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