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공부

두 번 상장은 반칙이다

colorprom 2022. 2. 7. 08:52

[태평로] 두 번 상장은 반칙이다

 

유망사업 떼어내 또 증시 상장
대주주는 경영권·자금 다 얻고
개미는 주주권 잃고 허울만 남아
지주회사 모범 LG가 무리수 둬

 

입력 2022.02.07 03:00
 

지난 설 연휴 직전 한국 증시에 시가총액 120조원짜리 거대 기업이 등장했다. LG화학 내 2차전지(배터리) 사업부로 있다가 독립한 LG에너지솔루션(엔솔)이다. 상장 첫날 삼성전자에 이은 시총 2위에 올랐다. LG화학 시총이 6위권이었는데 거기서 떨어져 나온 회사가 곧바로 2등이 되는, 배보다 배꼽이 훨씬 비싸지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LG엔솔은 그 배꼽의 일부를 팔아 13조원 가까운 자금을 확보했다. 아직 거액의 투자를 계속해야 하는 회사가 이만한 실탄을 마련한 건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LG에너지솔루션의 코스피 신규상장 기념식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매매 개시를 축하하고 있다./뉴시스

그러나 지금껏 배터리 산업을 믿고 투자해온 LG화학의 주주들은 진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LG엔솔 주식은 한 주도 못 받고 핵심 사업부만 도려내버린 셈이 됐기 때문이다. 개미(소액 투자자)들의 피눈물을 짜냈다는 말까지 나온다.

만약, 기존 LG화학 주식 100주를 가진 사람에게 LG화학 60주, LG엔솔 40주 식으로 나눠주는 방식(인적분할)이었다면 LG엔솔의 화려한 상장과 주가 상승에 LG화학 주주들도 환호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분할은 LG화학이 지분 100%를 소유한 자회사로 LG엔솔을 독립시키는 방식(물적분할)이었다. 어차피 LG엔솔 주인이 LG화학이니까 LG엔솔 주식은 나눠주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래 놓고 LG엔솔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아(상장) 또 한번 주주를 모집했다. LG화학 소액주주들은 허울만 좋은 ‘100% 자회사’의 시총이 LG화학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서는 모습을 씁쓸히 바라만 봐야 했다.

대주주들은 실리를 모두 챙겼다. LG화학 지분 57%를 가진 소액주주들은 LG엔솔 주주권을 잃었지만, LG화학 지분 33%를 가진 대주주 ㈜LG는 LG화학을 통해 LG엔솔 의결권을 100%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에 이 100% 지분 중 15%를 팔아 13조원의 실탄도 마련하고도 여전히 85%의 안정적인 지분율을 유지하고 있다. 주당 100만원을 넘겼던 LG화학 주가가 70만원 아래로 떨어진 건 이 같은 주주 가치 훼손과 대주주의 경영권 안정을 맞바꾼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1998년 개정된 상법은 이런 분할 방식을 허용했다. 당시 외환 위기로 기업이 줄줄이 쓰러질 때 부실 사업을 떼내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지금처럼 유망 산업을 떼내 또 상장하라고 고친 게 아니었다. LG엔솔뿐 아니라 최근엔 카카오에서 물적분할된 카카오페이의 대주주가 상장 후 거액의 지분을 팔아치워 물의를 일으켰다. SK이노베이션도 LG와 똑같은 방식으로 배터리 사업을 분할 상장할 예정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미래 유망 산업 자회사들의 분할 상장이 쏟아지고, 소액주주들은 투자한 회사의 유망 사업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부추기게 될지도 모른다.

글로벌 기업들은 기업을 분할해 상장하려면 자회사 주식도 기존 주주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지 않다면 분리한 자회사를 상장하지 않는다. 미국 구글이 지주회사 알파벳만 상장한 것도 주주권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권을 유지하면서 거액의 투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LG그룹의 고충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찌감치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었던 LG가 적은 지분으로 많은 기업을 지배하기 위해 정도를 걷지 않았다는 오점을 남기게 됐다. 건강한 주주 자본주의가 기업의 자금줄도, 국가 경제도 튼튼히 지킬 수 있다.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자고 희생시켜서는 안 될 가치다.